노벨문학상 수상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드디어 읽었다. 한강 특유의 섬세한 문장과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5.18.을 주제로 한 다른 매체 예술작품도 많기는 하지만, 소설만이 가질 수 있는 문장의 힘을 매우 잘 사용하여 독특한 작품 경험을 선사한다. 화려한 휴가, 택시운전사를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경험이었다.
문장을 읽어내려가며 장면을 상상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폭력의 현장, 육체에 아로새겨진 폭력이 시대를, 세대를, 시간을 건너 어떻게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그 인물들에 감정을 이입하며 작품을 감상하게 된다. '소년이 온다'를 읽으면서 한나 아렌트가 말한 구조적 폭력, 악의 평범성과 같은 개념들을 상기해 본다.
5.18.에서 한 소년이 죽었다. 그 소년의 죽음을 중심으로, 5.18.이 1980년의 광주, 그리고 그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화자를 달리하여 여러 장으로 나누어 조망한다. 소년의 입으로, 소년의 친구의 입으로, 소년을 아는 한 여자의 입으로, 소년의 어머니의 입으로 5.18.이 그들의 삶에 아로새겨졌는지를 폭로한다.
작품을 읽으면서 그들의 기억은 타자의 영역을 넘어서 우리 사회 전체의 공유기억으로 승화한다. 벌써 44년이 지났다. 2024년에 5.18.을 곱씹어본다는 행위는 어쩌면 1990년대 초반에 4.3.사태를 기억하는 것과 비슷한 행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1980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광주와는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독서를 통해 나는 1980년 5월의 광주 한복판에서 숨을 쉬던 동호가 된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이 되고, 폭력의 잔상에 여생을 고통받는 사람이 된다.
그러니까, 가끔씩은 이런 쓴 맛의 문학 작품을 읽어줘야 한다. 우리의 현재는 과거의 선택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삶에 우연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씩은 아픈 기억을 오롯이 마주해야만 한다. 과거를 현재로 불러와 우리가 당연히 서 있는 전제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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