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엄마와 오미크론

무소의뿔 2022. 3. 15. 22:41

아침에 일어나니 엄마가 마스크를 쓴 채 안방에 있었다. 컨디션이 안 좋아서 자가진단키트를 써보니 양성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근처 병원의 PCR 검사를 예약해두고, 집 안에서는 안방 밖으로 나오지 않고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나는 일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상황 파악도 안 되고 어안이 벙벙했다. 결국 오미크론이 우리 가족한테까지 오고 만 것이다.

일일 확진자가 거의 30만에서 40만에 육박하니, 우리 가족만 오미크론을 피해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언젠가는 걸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지난 주에 같이 골프를 쳤던 아줌마한테서 옮았다고 한다. 그 아줌마가 양성이라서 연락을 받고 엄마도 급히 검사를 한 것이다. 반나절을 기다린 PCR 검사 결과는 양성이었다.

방 안에 갇혀 있는 엄마를 위해 오늘은 내가 크고 작은 집안일들을 조금 처리해봤다. 매주 화요일은 우리 아파트의 분리수거일이다. 일주일 동안 쌓인 분리수거 쓰레기들을 정리하고, 설거지도 했다. 아빠는 퇴근하자마자 옷만 갈아입고 바로 골프 연습을 하러 갔다. 순간 되게 얄미웠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거의 반년만에 처음으로 설거지와 분리수거를 하는 것 가지고 내가 생색이나 부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엄마는 35년 동안 교직에 몸 담으셨다. 선생님으로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러면서도 나와 내 동생을 키우셨다. 집안일을 하다보니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쉬지 않고 일을 했을까 싶다. 엄마는 참 대단하다. 나는 2년 반 다닌 회사도 못 다니겠다 싶어서 때려치고 나왔는데, 한 직업을 평생을 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나는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버거워서 식사와 빨래, 설거지 모두를 여전히 엄마한테 일임하는데, 엄마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어떻게 매일을 자식들을 위해 식사를 차리고 집안일을 했을까?

은퇴한 엄마는 지금도 일상을 바쁘게 산다. 취미도 참 많다. 골프, 서예, 수채화, 영어 회화 공부, 거기에 최근에는 건강을 생각해서 헬스까지 추가했다. 여전히 6시 전에 일어나서 하루를 열고 그 많은 취미 활동을 데일리 루틴으로 꾸준히 실천한다. 나도 어디가서 부지런한 걸로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지만, 우리 집에서 내가 제일 게으른 편이라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엄마가 어디까지 메타적으로 사고하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실존적'이라는 수식어가 가히 과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까지 엄마와 함께 살지 모르겠지만, 엄마와 같이 있는 동안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 드리고 싶다. 가끔은 집안일도 도와드려야겠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내가 설거지를 해야겠다. 엄마와 더 많이 대화를 나누어야겠다. 엄마도 칭찬에 목마를 것이다. 서예와 수채화를 한 것을 내게 보여주면서 자랑을 하는 엄마다. 나는 퉁명스럽거나 건조한 목소리로 무덤덤하게 품평한다. 나쁘지 않다고. 엄마에게 더 많이 칭찬을 해드려야겠다. 기념일에 툭 던지는 비싼 선물만으로는 내 마음을 대변하기가 충분하지 않다. 더 좋은, 더 살가운 그런 아들이 되고 싶다.

오미크론이 엄마를 가볍게 지나가면 좋겠다. 아직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엄마이다. 아프지 않게 끝나면 좋겠다. 우리 가족 모두가 건강하면 좋겠다. 각자의 꿈들을 이루고, 각자의 일상 속에 평안이 깃들면 좋겠다. 애정이 넘치는 집안은 아니었지만, 부족할 것도 없는 집안이었다. 단지 내가 성격이 조금 모났던 것 같다. 누군가를 할퀴는 이 못된 버릇만 없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도 즐거웠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날카로운 말과 행동이 가장 가까이 있는 엄마를 더 이상 할퀴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누구보다도 따듯하고 충만한 봄이 우리 가족에게 찾아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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