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동생의 출국

무소의뿔 2022. 3. 6. 22:26

두 살 밑에 여동생이 하나 있다. 여동생은 이미 결혼 5년차이다. 동생 결혼식 때 내가 축가를 불러줬던 기억이 난다. can't take my eyes off you였다. 전날 회사 입사 예정자들 회식 모임이 있어서 맥주를 많이 마시고 목이 잠긴 채로 축가를 불렀었다. 동생한테 아직도 미안한 기억이다.

동생은 내가 봐도 참 대단하다. 동생은 키가 크다. 키가 173cm이나 된다. 어렸을 때는 줄곧 공부 때려치고 여자 프로농구나 하라고 농담을 하곤 했다. 동생은 그 농담을 대단히 싫어했지만, 나는 동생을 괴롭히는게 집 안에서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보다 더 어렸을 때는 다채로운 방법으로 많이 장난을 쳤다. 가위바위보해서 이긴 사람이 진 사람 엉덩이를 베개로 때리는 게임을 자주했었다. 물론 내가 남자고 힘이 더 세니까 같은 1대의 데미지가 같을 수가 없었겠지. 동생은 점차 그 게임을 싫어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동생이 이기면 2대, 3대, 5대, 10대, 20대까지 때리게 해줬다. 난 1대면 충분했다. 끝은 항상 동생의 울음이었다.

그밖에도 뭐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장난과 괴롭힘이 있었다. 동생은 나와는 성격이 정반대였다. 항상 부모님한테 친절했고, 부모님 말씀을 잘 들었고, 학창시절에도 단 한번도 일탈이나 사고를 일으킨 적도 없었다. 그야말로 바른 생활 그 자체였다. 바른 생활의 현현이라고나 할까? 심지어 체질적으로 술을 못 마셔서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는다. 다행히 매제도 술을 한 모금도 못 한다. 금욕 부부인 셈이다.

20대가 되고 나니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기회가 점점 줄어들었고, 우리는 각자의 인생으로 바빴다. 동생의 일과는 매우 루틴하고 단조로웠지만, 본인이 원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나도 내 삶을 규칙적으로 보내고 낭비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나보다 더 한 친구였다. 그 시지프스 같은 실존적 몸부림은 정말 나로서도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동생 부부는 오늘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떠났다. 동생 부부는 옛날부터 해외에서의 생활에 대한 로망이 있었고, 이번에 좋은 기회로 해외 지사에 파견을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최소 5년은 현지에 체류해야 한다고 한다. 물론 명절 같은 때에는 귀국행 티켓이 나오지만, 자주 못 보게 되는 건 사실이다. 뭐 그렇다고 한국에 있을 때 딱히 자주 봤던 것도 아니다.

동생의 출국이 아쉽거나 슬프거나 하진 않다. 사실 동생에 대해 어떤 특별한 감정이 있지는 않다. 굳이 찾자면 어린 시절에 좋은 오빠가 되어주지 못했던 점에 대한 미안함이랄까? 그래도 동생이 그곳에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동생 부부가 그곳에서 새로운 영감을 많이 얻고, 더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어 돌아오길 바란다.

그리고 그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 자신은 또 얼마나 많이 바뀌어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미래는 막연하지만, 조금 더 구체화된 미래는 상상과 현실 그 중간 어디쯤에 닿아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5년 후에는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5년 후에는 누구와 함께 하고 있을까? 어떤 취미에 빠져 있을까? 나의 세계관은 얼마나 단단해졌을까? 나는 얼마나 더 좋은 사람이 되어 있을까?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 속을 가볍게 스쳐간다.

다이어리를 끄적이다보니, 잠 못들던 20대 초중반의 새벽 같은 기분이 든다. 라디오헤드 노래를 들으며 촉촉한 밤 공기에 멍하니 고독을 씹던 젊은 날의 상념 같은 것들이 울컥한다. 이제 봄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봄이 성큼 다가왔다. 의미를 잃은 일상에 지금 불어오는 훈풍이 조금이나마 의미를 채워줄 수 있기를 바라며, 다이어리를 마친다.

동생아! 이역만리 먼 곳에서도 항상 건강하고, 매제와 함께 즐거운 추억 많이 쌓고 돌아오길 바란다. 아버지, 어머니 환갑은 내가 각 알아서 잘 챙길게ㅋㅋㅋ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또, 머선129  (0) 2022.04.03
사소하지만 중대한 변화  (0) 2022.03.23
다짐  (0) 2022.03.20
엄마와 오미크론  (0) 2022.03.15
2021. 12.의 일기  (0) 2022.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