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Domestic

2022 제주 가족 여행 - Day.1

무소의뿔 2022. 11. 7. 22:45

아빠가 환갑이 되었다. 예전에 과학 기사 중에 사람에게는 3번의 노화의 부스터가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본 기억이 난다.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사람은 만 35살, 만 55살 그리고 만 70살에 급격환 노화의 변곡점을 지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요새 보면 부쩍 엄마와 아빠가 예전 같지 않다. 피부도 많이 주름져지고 탄력을 잃은 것 같고, 엄마는 특히 건강이 전반적으로 안 좋아지신 듯하다.

작년 가을부터 다시 본가에 들어와 살았다. 갈 곳이 없어진 탓도 있지만, 무리를 하면 따로 나가 사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이 더 늙기 전에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돌아온 직후에는 엄마와 종종 다투기도 했지만 금세 균형을 찾았고, 그렇게 일상에 적응하다보니 삶의 많은 부분을 엄마에게 여전히 의탁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았다. 빨래와 식사, 심지어는 내 닭가슴살과 오트밀 주문까지 말이다.

다 큰 놈이 뭐가 그렇게 바빠서 자신의 삶을 챙기지 못하고 삶을 의탁한다는 것이 참 부끄러웠다. 하지만 또 그 익숙함에 길들여져버려 고마움은 쉬이 잊혀지기 마련이다.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가 아니었고, 아빠도 처음부터 아빠가 아니었을진대, 나는 왜 당연하지 않은 걸 당연하게만 생각할까? 그런 부모님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을 내는 것뿐이었다.

2018년 동생 결혼을 앞두고 가족끼리 오키나와에 여행을 다녀온 것이 마지막이었다. 4년이 지나는 동안 부쩍 늙은 부모님을 모시고 4박 5일 동안 제주도를 여행하고 왔다. 멀리 해외에 살고 있는 동생 내외는 함께 하지 못해서 다소 아쉬웠지만, 앞으로 또 좋은 기회가 있을 것이다. 가장 달라진 것이 있다면 부모님을 대하는 내 태도다. 살아보니, 나이를 먹어보니, 삶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아니 삶은 참 고단하고 어렵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난 우리 엄마 아빠가 참 대단한 것 같다. 두분은 그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어찌 그 고단한 세월을 이고지었을까?

금요일 아침 비행기로 일찍 김포를 떠나 제주로 향했다. 카카오택시를 쓸 줄 모르는 우리 엄빠를 위해 택시를 호출하고 캐리어를 트렁크에 싣고 김포공항으로 향한다. 비행기에서 내내 졸다가 소음에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랜딩 중이다. 제주의 푸른 하늘이 우리 가족을 반갑게 맞이한다.

아침을 꼭 챙겨먹어야 하는 우리 엄마. 렌트카를 인수하고 우리가 바로 찾은 곳은 우진해장국이었다. 하지만 대기번호 199번이라니, 정말 무시무시한 인기다. 급한대로 우진해장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삼도해장국이라는 가게로 향했다. 엄마는 류머티스로 관절이 안 좋아 약을 제때 챙겨 먹어야 하기 때문에 끼니를 꼭 챙겨야 한다.

고사리육개장은 처음 먹어보는데, 메밀 전분을 써서 국물이 걸쭉한게 특징이다. 삼삼한 맛에 자극적이지 않아서 아침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지이다. 하지만 헬창인 내게는 단백질이 부족해 보인다. 소고기가 조금 들어있긴 하지만 거의 데코 수준이다. 맛은 훌륭했다. 삼도해장국이 이 정도일진대, 우진해장국은 얼마나 맛있단 말인가..?!

요기를 마치고 엄빠를 데려간 곳은 제주 공항에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 있는 이호테우 해변이다. 목마 모양을 한 등대가 이 해변의 시그니처다. 사실 해변 자체보다 이 등대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작년 9월에 자전거로 제주도를 일주한 적이 있어서, 제주도 관광지에 대한 이해가 나름 깊어져서, 이번 여행에서도 동선을 짜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빠가 설명해줬는데,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는 그냥 색을 칠하는 게 아니라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빨간 등대는 바다에서 항구 쪽으로 향할 때 왼쪽으로 항해가 가능하다는 의미고, 하얀 등대는 오른쪽으로 항해가 가능하다는 의미라고 한다. 아빠한테는 여전히 배울 것들이 많다.

빨간 목마 등대 아래에서 부모님 사진을 한 컷 찍었다. 다시 사진으로 보니 두 분 미소가 참 환하다.

이호테우 해변 좌측으로 넓게 펼쳐진 해안가 마을. 저 멀리가 아마 애월인가?

원래는 이호테우 해변 근처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을려고 했는데, 이호테우에서 딱히 할 게 없어서 바닷바람만 조금 쐬다가 다음 행선지인 한라수목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카페인 충전을 위해 수목원 바로 근처의 카페에 들렸다.

엄마는 생강차, 아빠와 나는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나는 거기에 스콘까지 하나 더 얹어 먹었다. 스콘은 의외로 맛이 좋았는데, 탄수화물만 끊임없이 때려박는구나. 생강차는 레디메이드 제품이 아니라 가게에서 직접 담근 청으로 만든다고 한다.

부모님은 제주 여행을 꽤 많이 온 편이라 웬만한 여행지는 다 다녀온 상태였다. 한라수목원은 다행히 두 분이 경험한 적이 없어서, 컨펌을 받아 첫째날 행선지로 넣어두었다. 경사가 심하지 않고 걷기 편한 길로 되어 있어서 가볍게 산책하기에 좋았다.

수목원에서 바라본 제주 시내 전경. 제주도 이제 옛날 제주가 아니구나. 왠만한 중소도시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발전했다. 가족과 제주 여행을 온 것은 2002년이 마지막이었으니, 20년만에 엄마와 아빠와 찾은 제주도다. 감회가 새롭다.

돌아오는 길에 노루도 한 마리 보인다. 사람 손을 타서일까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뿔이 한 쪽밖에 없었는데, 한 쪽이 왜 없는지는 모르겠다. 얼마나 아팠을까.

짧은 수목원 산책을 마치고 오후가 되었다. 동쪽으로 한 시간 정도를 달려 평대리로 갔다. 평대에는 내가 애정해 마지 않는 명진전복이라는 아주 훌륭한 전복돌솥밥 가게가 있다. 부모님께도 꼭 소개해 드리고 싶었다.

맛집답게 웨이팅은 기본이다. 기다리는 동안 평대리의 맑고 깊은 바닷가를 거닐어본다.

찍사로 나선 여행이니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 사진 찍을 때 엄마가 표정을 잘 못 내비치는게, 내가 엄마를 꼭 닮았다. 카메라만 들이대면 멀쩡하게 잘 웃던 웃음기도 사라진단 말이다. 엄마의 웃는 모습을 더 많이 담아야 한다.

셀카를 좋아하는 아빠가 총대를 메고 셋이서도 한 장 사진을 찍어본다. 엄마 뭐라고 할 것 없다. 나도 참 못 웃는다.

명진전복은 이번이 벌써 네 번째 방문인데, 단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다. 엄마와 아빠도 상당히 만족한 눈치이다. 양보다는 질로 승부하는 집인데, 그렇다고 양이 부족하지도 않다. 전복은 참 싱싱하고 돌솥밥은 영양밥 스타일에 전복 내장으로 맛과 색을 내서 바다의 풍미가 짙다. 이번에도 크게 만족하고 돌아간다.

주전부리를 좋아하는 우리 엄마. 명진전복 바로 앞에 귤하르방을 파는 가게에서 7,000원 어치나 샀다. 화장실을 다녀오는 사이에 가게 주인이 샘플로 맛을 보라고 엄마한테 귤하르방을 하나 건넸던게 제대로 먹혀들어갔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5,000원 어치를 사려고 했다가 가게 주인 가라사대, 7,000원 어치를 사면 2,000원만 더 보태는 셈인데 양이 아주 많다고 꼬드겨서 7,000원 어치를 결국 샀다고 한다. 별 것 아닌데 웃음이 난다. 맛은 델리만쥬 안에 옥수수 크림 대신 귤 크림이 들어있는 듯한 맛이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평대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월정리로 향했다. 월정리는 서퍼들의 성지이다. 11월이 목전이라 물이 결코 따듯하지 않은데도 십수명의 서퍼들이 강습을 받고 있었다. 대단한 열정이다.

바다에 오면 바닷물에 발을 꼭 담가 주어야 한다. 그게 바다를 맞이하는 예의다. 제주라 그럴까, 10월 말인데도 견딜 만한 온도였다. 오랜만에 바닷물에 발을 적시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살아있음을 느낀다.

고즈넉한 월정리 바다를 보며 잠시 상념에 잠기는 시간도 가져본다. 참 좋은 때를 맞춰서 여행을 왔다.

밥 배와 간식 배는 따로 있다고 했던가. 나도 디저트의 세계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번에 제주 여행을 기획하면서 이리저리 모은 맛집 정보 중에 월정리에서 머지 않은 곳에 아주 훌륭한 수제 푸딩 가게가 있다고 해서 일부러 방문했다. 간판이 참 앙증맞게 귀엽다.

다행히 부모님도 모두 만족해 하셨다. 푸딩 3개를 세트로 팔길래 순우유푸딩, 감귤푸딩 그리고 말차푸딩을 골랐다. 다른 커플들을 보니 푸딩과 아이스크림 세트를 많이 선택하는 것 같았다. 제일 맛있는 놈은 순우유푸딩이었고, 그 다음이 말차푸딩. 감귤푸딩도 나쁜 맛은 아니었는데 우유의 부드럽고 고소한 맛과 감귤의 톡 쏘는 상큼함이 약간은 따로 노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부모님이 만족했으니 됐다.

관광 일정을 마치고 함덕의 소노벨에 체크인을 하고 나니 어언 다섯시가 다 되어간다. 새벽부터 분주했던 우리는 여기서 일정을 마치고, 나는 막간을 이용해 사우나에 딸려 있는 헬스장을 찾았다. 규모는 작은데, 의외로 있을 것은 다 있었다. 등과 어깨 루틴을 컨디셔닝 운동하듯이 짧은 인터벌로 털어주고 사우나로 마무리하니 개운하기가 그지 없었다.

저녁을 먹으러 밤거리로 나오니 함덕해수욕장 네온사인이 빛나고 있다. 올해 4월에 혼자 함덕을 찾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짧았지만 좋은 추억이 참 많았는데 말이다. 어느새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다.

내일은 아침 일찍 아빠와 한라산 등정을 떠나야 해서 저녁은 가볍게 먹기로 했다. 사실 명진전복을 저녁으로 먹을 요량이었는데, 점심으로 먹어 버려서 저녁 식당은 미리 섭외를 못한 상태였다. 급하게 네이버 검색을 돌려서 무난한 해물칼국수 집을 찾았다.

칼국수만 먹을 생각이었지만, 애주가인 아빠가 한라산을 한 병 주문했다. 한라산을 마시고 한라산으로 가야 한다. 엄마는 술을 안 하고, 나와 아빠가 반 병씩 소주를 나눠 마셨다. 알딸딸한 기분으로 일찍 잠에 들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제주 여행 첫 날의 밤이 저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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