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가족 여행 2일차 코스는 아빠와의 한라산 등정이다. 엄마도 함께 가면 좋았겠지만, 엄마는 관절도 안 좋고 체력도 달려서 애진즉 포기하고 아빠와 나 둘이만 산행에 나섰다. 산행의 출발지와 도착지가 달라서 엄마의 도움이 필요했는데, 출발지는 우선 내가 운전을 하고, 엄마가 차를 끌고 엄마 혼자만의 일정을 보내고 도착지로 와서 아빠와 나를 픽업하는 동선이었다. 전날 미리 챙겨둔 먹을거리를 가방에 짊어지고 아침 7시, 등산에 나섰다.
자전거 국토종주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고 새로운 도전 목표로 세운 게 바로 한국의 100대 명산 완등하기였다. 너무나 당연히 한라산은 100대 명산에 포함되어 있다. 새로운 도전의 첫 시작을 아빠와 함께 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아빠는 젊어서 대학 시절에 산악부 활동을 할 정도로 산을 참 좋아한다. 스스로를 ’산꾼‘이라 칭할 정도이니 말 다 했다. 아빠와 함께 산을 오르는 것은 진짜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 일인 듯하다. 초등학생 때야 아빠 손에 이끌려 서울 근교의 이 산 저 산을 주말마다 자주 올랐지만, 중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는 함께 등산을 할 일이 없었다. 친구가 더 중요했던 시기였을 것이다, 사춘기이기도 하고. 너무 오랜만이라서 아빠와의 산행은 더욱 의미가 있다.
꽤나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한라산의 정경이 참 좋았다. 아빠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오르는 산길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사람은 같지만 달라진 것은 마음이다. 나는 아빠를 더 잘 이해하고 싶어졌다. 그럴 나이가 된 것이다. 싸운 적은 없지만, 화해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한라산을 오르며 우리는 많은 또는 적은 대화를 나누었다.
한라산을 오르면서 아빠 대학시절, 아빠가 속한 산악부에서 겨울에 한라산으로 등산을 왔다가 공수 비행기 추락 사고가 있었고 그 공수부대원들을 구조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참 별 일이 다 있구나 생각했는데, 그 이야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원점비를 발견했다. 하고 많은 코스 중에 관음사 코스를 선택했고, 그 코스 중에 원점비를 딱 마주친다는 이 기묘한 우연이 신기했다. 하지만, 아빠는 돈이 없어서 겨울 산행에 함께 하지 못했다는 말은 참 가슴 아팠다. 가난한 농군 집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서 맨몸으로 생의 풍파에 맞서 살아온 아빠의 인생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부모님이라는 든든한 우산 아래서 안락하게 커온 나로서는 가늠키 어려운 일이다.
아빠는 참 체력이 좋다. 지금도 보통의 환갑 어르신들을 생각해보면, 상위 10% 안에 들만큼 건강하다. 마라톤 완주를 15번이나 할 정도로 운동도 열심이다. 생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아빠보다 한참 젊은데도 체력은 아빠에 미치지 못했다. 최근 몇 년간 운동에 본격적으로 매진하면서 이제야 비로소 아빠를 체력적으로 넘어섰다는 느낌이다. 그만큼 아빠는 내게는 거대한 산 같았다. 항상 든든했고, 믿는 구석이었다. 이번 산행에서는 내가 짐을 짊어지고, 내가 앞장을 섰다. 아빠를 체력적으로 넘어섰다는 것은 내게는 그닥 즐거움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아빠가 지금의 건강을 더 오래 유지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일반인 기준으로 5시간이 걸리는 코스를 아빠와 나는 세 시간만에 완등했다. 등정보다 힘들었던 것은 추위였다. 특히 안개 속으로 향할수록 기온이 급강하했는데, 반팔에 바람막이만 입고 등산을 떠난 나로서는 꽤나 고역이었다. 정상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특히 힘들었는데, 춥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입산 통제를 했는데도 워낙 사진 찍기가 인기 있어서 그런지 1시간을 겨우 기다린 끝에 우리도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래도 사진 찍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아빠와 내가 한라산 정상을 함께 오를까. 시간은 빠르게 흩어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는 그다지 많지 않다.
부자지간에 다정한 투샷을 남겨본다. 아빠의 얼굴에서 내가 보이고, 내 얼굴에서는 아빠가 보인다. 살가운 아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못된 자식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 아빠를 따라 관악산이나 북한산 정상에 오르면 아빠가 꼭 “야호”를 외쳐보라고 시켰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 놀랍게도 진짜 메아리가 들려왔다. 부쩍 늙은 아빠의 얼굴이 조금은 서글프다.
등산 후에는 사우나를 마치고 가족이 셋이서 흑돼지를 먹으러 호텔 근처의 고깃집으로 갔다. ‘제주삼춘’이라는 숙성 흑돼지집이었는데, 고기를 훈연으로 초벌구이를 해온다는 게 특징이었다. 고기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 우리 엄마가 이번 제주 여행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식사로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맛은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아빠와 술잔을 기울이며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가족은 모두 행복한 저녁 시간을 보냈다.
부모님은 먼저 호텔로 돌아가고, 나는 취기에 함덕 밤바다를 이리저리 쏘다녔다. 해변이라고 해봤자 한 줌이라 그리 오래 쏘다닐 것도 없었다. 전망이 좋은 라운지바에서 깔루아밀크를 한 잔 시켜 마시며 해변과 네온 불빛을 바라본다. 제주 여행의 2일차 하루는 이렇게 저물어간다.
'Travel > Domestic'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 제주 가족 여행 - Day.5 (0) | 2022.11.18 |
---|---|
2022 제주 가족 여행 - Day.4 (0) | 2022.11.17 |
2022 제주 가족 여행 - Day.3 (0) | 2022.11.16 |
2022 제주 가족 여행 - Day.1 (0) | 2022.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