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Domestic

2022 제주 가족 여행 - Day.5

무소의뿔 2022. 11. 18. 11:14
728x90

드디어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체크아웃 전에 잠깐 시간을 내어 호텔 앞의 산책로를 엄마와 함께 거닐었다. 제주 올레길의 일부 구간을 공유하는데, 호텔 측에서 정비를 잘 해놔서 걷기 편한 길이었다. 제주 남쪽의 깨끗한 바다에서 하루를 활짝 열어본다.

나무 사이로 하트 모양의 하늘이 만들어진다. 포토스팟이라고 나름 몇 가족이 줄 서서 사진 찍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엄마도 한 장 사진을 남겨줬다.

마지막 날의 첫 관광은 ‘세계 술 박물관’. 이 박물관은 서귀포로 넘어오면서 우연히 안내판을 보고 알게 되었는데, 제주도에 별에 별 박물관이 다 있어서 약간 반신반의했지만 막상 가서 관람하고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9시 개장이라 우리가 첫 관람객이었는데, 사람이 없어서 아주 쾌적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술 박물관을 둘러보고 드는 생각은 나도 직접 술을 한 번 담가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나도 나이가 많이 들어 은퇴를 하고 나면 누룩이나 빚으면서 술 담그는 노인으로 살고 싶다는 그런 망상 말이다.

다음에 들린 곳은 김영갑 사진작가의 작품을 전시해 놓은 ‘갤러리 두모악’이다. 김영갑 작가는 제주의 오름이 너무 좋아서 아예 제주에 뿌리를 내리고 제주 오름 사진 찍기에 평생을 매진해 왔다고 한다. 그러다 루게릭 병으로 많지 않은 나이에 요절했는데, 그 후배들이 힘을 모아 폐교를 갤러리로 꾸며 개장한 전시 공간이다. 전시 작품이 많지는 않지만 한 컷 한 컷이 제주와 오름에 대한 작가의 열정과 애정이 느껴졌다. 엄마와 아빠가 연초에 둘이 제주로 여행 왔을 때 들렸던 갤러리인데 너무 좋아서 내게도 한 번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갤러리 관람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교래리로 이동했다. 교래리는 제주 북부쪽 중산간에 위치해 있는데, 산굼부리 오름이 위치한 마을이다. 김치와 매콤한 맛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전날 급히 검색해둔 묵은지찜 가게로 갔다. 이름은 ‘식당 교래’. 흑돼지 묵은지찜을 시켰는데, 엄마가 엄청 만족했다. 물론 나도 만족스러웠다. 엄마의 매운 맛 사랑은 진짜 대단하다. 아빠와 함께 폴란드 여행을 갔다가 현지에 사는 친구 부부네 초대를 받고 일주일 만에 김치찌개를 먹었다는 그 이야기는 아직도 간간이 회자된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산굼부리 오름을 올랐다. 걷기 좋게 산책로가 잘 구비되어 있고, 가을 억새로 유명한 오름이다. 1986년인가 1982년인가 엄마가 대학생일 때 같은 과 친구들과 함께 제주로 여행을 왔을 때 올랐었다고 한다. 한 세대가 지나 다시 오름을 오르는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궁금하다. 나는 이번이 첫 방문인데, 30년 후에 다시 오른다면 지금의 엄마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까?

엄마와 다정한 투샷을 남겨본다. 억새가 한창 절정일 시즌이라 끝없이 펼쳐지는 은빛 억새의 물결이 참 아름다웠다. 엄마와 사진을 찍는 건 여전히 항상 어색하다. 사실 사진 찍을 때 가장 웃지 못하고 어색한 사람은 바로 나다.

오름 투어를 마치고 마지막 일정으로 삼양해변을 찾았다. 삼양해변은 현무암이 풍화, 침식되어 모래가 된 검은모래해변으로 유명하다. 바다 바로 앞에 ‘에 오 마르’라는 베이커리 카페에서 바다를 보며 커피와 빵을 즐기는 시간을 가졌다.

셀카도 한 장 박아본다.

정말 검은 모래다. 해변을 가볍게 거니는 것으로 진짜 여행을 마무리했다. 이후는 뻔한 일정이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공항으로 이동하고 면세 담배를 사고 면세 양주를 사는 것 말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전까지의 가족 여행에서는 부모님이 계획하고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갔다면, 이제는 내가 계획하고 부모님을 모신다. 그만큼 부모님은 나이가 드셨고, 내가 이제 정서적으로 부모님을 돌봐드려야 하는, 그리고 돌봐드릴 수 있는 나이와 사람이 된 셈이다. 엄마와 아빠를 대하는, 엄마와 아빠에 대한 내 관점도 많이 성숙해졌다. 이번 제주 여행, 나아가 2022년은 엄마아빠와 나의 관계의 질적 대전환이 이루어진 한 해가 아닐까 싶다. 오랜 시간이 걸려 드디어 화해를 완성한 기분이다. 서울에 돌아가서의 삶은 일상에 용해되어 금방 무심해지고 무감각해지겠지만, 언제라도 이번 제주 여행을 떠올리면 금세 마음이 포근해질 것이다.

728x90

'Travel > Domestic'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 제주 가족 여행 - Day.4  (0) 2022.11.17
2022 제주 가족 여행 - Day.3  (0) 2022.11.16
2022 제주 가족 여행 - Day.2  (1) 2022.11.11
2022 제주 가족 여행 - Day.1  (0) 2022.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