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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 밀러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소의뿔 2022. 3. 22. 22:35

밀리의 서재로 읽은 책이다. 뭔가 제목이 확 끌리는 것이 인상적이었고, 부제인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가 특히 이목을 끌었다. 요새 유행하는 류의 독자 위로형 심리 에세이라고 생각이 들었고,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싶어서 한 번 읽어보기로 했다.

하나 확실한 점은, 글의 흡인력이 정말 강하다는 것이다. 하루키 소설 이후에 이렇게 몰입감 있게 책을 읽었던 적은 처음이다. 아니면 번역가의 역량일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건 정말 오랜만에 독서 그 자체에 몰입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둘, 글의 성격을 정확히 정의하기 어렵다. 책의 초반부까지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주인공인 소설인 줄 알았다. 요새는 소설을 이렇게도 쓰는구나. 마치 소설인지 평전인지 구분이 안 가는데, 서사의 힘이 강력한 것도 아니면서도 눈을 떼지를 못 했다. 책의 중반부 정도에 이르러서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 대한 평전이라고 확신했다. 평전이지만 좀 경쾌하게 쓰여진 그런 글로 넘겨짚었다. 중간중간 룰루 밀러의 이야기가 녹아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글의 맛을 위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책의 후반부에 도달해서 드디어 깨달았다. 이 책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생애를 좇았던 룰루 밀러의 자전적 이야기를 토대로 한 삶의 자세에 관한 에세이라는 것을.

셋, 그래서 명쾌한 교훈이 있다. 우리 존재의 지독한 무의미에 고뇌하던 밀러가 데이비드의 생애를 좇으면서 어떻게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지가 바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장 생생한 교훈이다. 이 세상에 의미가 없는 것은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정언명령이다.

넷, 근대 생물학의 역사의 패러다임적 전환과 밀러의 인식의 변화가 궤를 같이 한다. 즉, 과학의 발전사를 따라 밀러의 인식은 변증법적으로 팽창하고, 그 끝에 독자에게 건네는 메시지가 있다. 데이비드의 일생에서 우생학으로, 우생학에서 그 극복으로 나아가는 전개는 과학과 진보라는 미명 아래 인류가 행했던 끔찍한 만행에 대한 자기반성과 함께 밀러가 자신의 생에 대한 비관에서 낙관으로 나아가기 위한 여정이다.

다섯, 상당히 과학적인 주제와 상당히 철학적인 주제가 이질감 없이 조화를 이룬다. 어떠한 사실 또는 현상에서 어떠한 가치 또는 당위를 도출해 나가는 과정은 에세이의 상당히 보편화된 툴이지만, 그런 식상한 느낌 없이 물 흐듯이 흐르는 글의 전개가 일품이다. 소설에서의 흡인력과는 또 다른 유형의 흡인력이다. 

책에서 특히 흥미를 끌었던 부분은 과거 우생학 광풍이 미국 사회에 어떠한 상처를 남겼는지에 대한 서술이다. 우생학의 광기에 대해서는 대학 교양 과학 시간에 얼핏 배우긴 했지만, 실제로 미국 전역에서 불임화에 관한 법률이 제정, 통과되고, 부적합자에 대한 불임시술이 이루어졌고 그로 인해 상처 받은 자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까지는 몰랐다. (이 대목에서 진격의 거인이 갑자기 떠오른다... 에르디아인의 안락사 계획...) 하긴 우생학 신봉자인 히틀러가 인종청소를 단행한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미국 대륙에서도 상당히 강한 우생학 광풍이 불었다는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접하였다.

밀리의 서재에는 판권 문제 때문에 읽을 만한 책이 조금 부족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읽은 것만으로 이번 달 구독료는 값어치를 한 셈이다. 이 책에 대해 다시 정리하겠다. 이 책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일생을 다룬 평전임과 동시에 룰루 밀러의 자기 생에 대한 깨달음을 기록한 이야기이자, 동시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에세이이다. 지식과 위로를 동시에 받고 싶다면, 주저 말고 이 책을 집어들어보자.

"나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