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정년퇴임을 기념하여 가족 식사를 하러 롯데호텔 도림을 방문했다. 2025년 2월 프로모션으로 중식의 대가 여경래 셰프와 콜라보레이션을 한 '여경래 다복 코스'를 선보인다고 해서 별 고민 없이 해당 코스로 예약했다. 흑백요리사를 재밌게 봤던 기억 덕분이었다.
6시 식사였는데, 해가 꽤 길어져서 아직 어둠이 나리지 않은 광화문 일대를 조망할 수 있었다. 오른 편으로는 종로타워와 센트로폴리스가 보이고, 왼편으로는 SFC가 보인다. 식당에 따로 축하 문구를 부탁 드렸는데, 마커 펜을 이용해서 간결하고 멋드러진 문구를 장식해 주셨다.
중식답게 기본 찬으로 짜사이와 볶은 콩이 나왔다. 맨 왼편의 찬은 이름을 들었는데 까먹었다. 아삭하고 고급스러운 단무지와 비슷한 맛이었다.
전반적으로 퓨전 중식이라기보다는 정통 중식에 가까운 코스 구성이다. 전채와 후식 사이의 코스 요리들이 거를 타선이 없이 훌륭했다.
모든 호텔 식당이 다 그러하겠지만 콜키지 비용이 사악하기 그지 없다. 중국 증류주는 병당 10만원, 위스키 류는 병당 30만원의 콜키지 비용이 발생한다. 그럴 바엔 그냥 적당한 술을 식당에서 주문하는 게 낫다. 공부가주 자약을 주문해서 곁들임 주로 삼았다. 15만원으로 나름 합리적인(?) 가격이다.
전채요리는 무난했다. 발효 계란, 해파리 냉채, 새우, 닭가슴살이 적절하게 한 피스씩 나와서 입맛이 꽤 돋우어졌다. 원래 오이를 먹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먹었다. 신기하게 고급 식당에서 나오는 오이는 오이 특유의 그 향과 맛이 다 죽어 있어서 그럭저럭 먹을 만하다.
도림의 시그니처 메뉴인 불도장. 해삼, 전복, 닭고기, 송이버섯 등 좋은 재료가 듬뿍 들어간 국물요리이다. 불도장이 나는 Fire Stamp 인줄 알았는데, 그 맛이 너무 좋아서 불교를 공부하던 승려가 담을 넘어 도망쳤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불도 장'이었던 것이다. 재료 그 자체보다도 국물의 감칠맛이 특히 일품이었다.
서빙하시는 분께서 국물을 적당히 먹고 나면 홍초와 두반장을 첨가해서 먹으면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고 권했다. 조금 더 맵싹하게 먹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내게는 오리지날 육수의 맛이 더 깊이 있게 다가왔다.
다음 코스는 여경래 셰프의 시그니처 메뉴인 모자 새우. 칠리새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요리이다. 튀김옷은 날아갈 듯 가벼우면서도 크리스피하고 새우는 비린 맛이 전혀 없이 달고 고소하다. 머리는 조금 더 본격적인 튀김의 맛이고, 몸통은 튀김옷 안에 부드러운 속살이 한가득이다.
다음 메뉴로는 전복 요리가 나왔다. 바짝 쫄인 국물에 면과 통전복 그리고 그 위에 무슨 버섯을 올렸다. 버섯 이름은 까먹었다. 해초류 같은 식감이었다. 전복은 잘 삶아져서 쫄깃했다. 국물이 특히 일품이었는데, 달짝지근하면서도 깊이 있는 맛이었다.
XO소스로 맛을 낸 해삼과 랍스타 요리이다. XO소스가 꼬냑 XO로 만든 소스라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어쩐지 중식당에 가면 XO게살볶음밥이 꽤 자주 보였는데, 그 소스가 그 소스였구나! 랍스타도 맛이 훌륭했지만, 해삼을 이렇게 부드럽게 삶아서 먹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주로 횟집에서 생 해삼을 얇게 썬 것들을 먹었었는데, 조리된 해삼은 쫄깃쫄깃한 식감이 훌륭했다.
마지막 메인 메뉴인 한우 안심 구이. 구이 요리이지만 중화풍의 소스로 버무려내오니 중국 요리 느낌이 물씬 난다. 지금까지 해산물이 주로 나와서 육고기가 나올 타이밍이긴 했지만, 익힘 정도가 내가 원하는 수준보다 다소 타이트해서 아쉬웠다.
식사는 짜장면, 짬뽕, 기스면 중에 고를 수 있다. 짬뽕은 매워서 싫고, 짜장면은 흔해서 별로였다. 평소에 거의 안 먹어본 기스면을 택했는데, 국물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닭육수 베이스로 고급진 맛을 뽑아냈다. 정갈한 느낌이었다.
디저트가 또 요물이었다. 컵에 담긴 음료는 멜론 베이스의 달달한 생과일 쥬스이고, 두 조각 딸기 케이크도 훌륭했다. 크림과 빵의 조합이 상당했다.
아버지를 위해 주문 제작한 사진 케이크. 나는 사진이 그냥 특수코팅된 종이로 올리는 건 줄 알았다. 목 부분을 슥 만졌는데 만지고 보니까 초콜릿이었다. 기술에 놀라고 나의 부주의에 또 한번 놀랐다.
공부가주로 얼큰해진 아빠와 나 그리고 엄마. 우리 가족에게 중요한 하루였는데, 도림에서 제대로 잘 마무리한 듯하여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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