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자취방으로 다시 돌아온지 어언 3주가 다 되어간다. 한달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집을 떠나 있다가 오랜만에 돌아왔다. 처음에는 다소 어색하기도 했지만 적응은 금방이다. 자취방에 처음 돌아오던 날을 떠올려보면 몸이 많이 좋아졌다. 이제는 혼자 씻고 생활하는 것도 능숙하다. 최근에는 실내에서는 손목에 댄 부목을 빼고 생활해도 좋다는 담당의의 소견도 듣고 왔다. 손뼈는 원체 잘 안 붙는 까다로운 뼈인데 그래도 예후가 좋은가보다. 내일은 쇄골 수술을 집도했던 다른 담당의의 외래 진료를 받으러 인천으로 가야 한다. 아마 암슬링을 벗어도 된다는 좋은 소식이 있지 않을까 몹시 기대를 하는 중이다.
요새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게 버릇이 되었다. 2시가 다 되어야 겨우 잠에 들고, 10시를 즈음해서 일어난다. 그날그날의 기분과 컨디션에 따라 회사로 출근을 하기도 하고 재택을 하기도 한다. 나태한 삶은 10월까지만 해야지. 11월부터는 무엇이라도 새로 시작해보고 싶은 기분이다. 사실 오늘도 그 일환으로 1시에 자려고 마음 먹었었는데, 불청객 모기가 찾아들었다. 오늘 어쩐지 날이 좀 따듯하더라더니 바로 모기가 기승을 부린다. 잠시 정신을 팔고 있었더니 온몸 구석구석 다섯 방 정도가 물렸다. 가려움과 스마트폰 화면 불빛에 어른거리는 모기의 실루엣 때문에, 잠을 청하려다 말고 컴퓨터를 켜고 오랜만에 일기를 써본다.
다음 주에는 강남 자취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본가로 돌아가기로 했다. 강남에 머물고 있을 실익이 없어졌다. 몸도 안 좋고 말이다. 집을 떠나온지 정확히 13개월 만이다.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사소한 일부터 큰 일까지 꿈꾸던 것들이 참 많았는데, 그 중에 얼마나 이뤘는지는 모르겠다. 목표로는 본가에서 1년만 머무르고 다시 나오는게 목표인데,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다. 당장 한치 앞의 일도 모르는데 1년 후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얼마전부터는 다시 술도 마신다. 집에 남은 위스키를 언더락으로 홀짝이는 취미가 생겼다. 최근에 조니워커 반병 남아 있던 것을 다 비워서 이제 집에 남은 위스키라고는 보모어뿐인데, 새 병이라 오픈하기가 아까워서 박재범의 원소주를 언더락으로 마시며 일기를 쓴다. 원소주도 그럭저럭 풍미가 나쁘지 않다. 애초에, 술의 풍미라는 걸 판단할 만한 미각이 내게는 없다. 적당한 취기만 빌려오는 것이다.
최근에 교보문고에서 책을 구매했다. 원래 8월 독서 목표였던 '현대 철학의 광장'을 본가에 두고 왔다. 아직 다 아물지 않은 쇄골로 이 책을 짊어지고 오기엔 무리라는 판단이었지만, 내심으로는 두껍고 어려운 책을 잠시 미뤄두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새로 산 책은 '불변의 법칙'이라는 투자 서적인데, 비단 투자에 국한된 교훈만은 아니고 어지러운 세상 속 우리가 어떠한 기준을 갖고 의사결정을 해가야 하는지에 관해 쓴, 인생 경영서라고 보는게 맞겠다. 하루에 3챕터씩 읽고 있고, 아마 이사 전까지 책을 마무리할 수 있을 듯하다. 한번 읽고 치우기에는 꽤 훌륭한 책이라, 두고두고 곱씹으며 읽어볼 요량이다.
어제와 오늘은 스도쿠도 한 판 풀어보았다. 입시 공부를 하기 싫을 때 스도쿠를 풀며, 이건 노는게 아니라 두뇌에 자극을 주는 거라며 자위했던 기억이 늘 떠오른다. 변명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스도쿠는 재밌다. 규칙을 따라 빈칸을 채워가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그 게임 방식이 즐거운 것이다. 오늘은 거의 두달 만에 피아노도 연주해 보았다. 그래도 재즈 연습곡을 거의 매일 반복 연습하던 가닥이 아직 남아 있는지, 제법 코드 연주가 되어서 만족스러웠다. 쇼팽 곡은 연주가 꽤 많이 무뎌졌는데, 며칠만 다시 하면 폼이 회복될 듯 싶다. 몸의 기억이라는 게 이렇게 놀랍다.
오늘은 엄마의 환갑 생일이었다. 생일을 위해 미리 롯데호텔의 무궁화를 예약해 두었다. 더 부지런했다면 더 훌륭한 레스토랑도 예약할 수 있었을까, 다치고 시간이 아주 많아지고 난 후에야 불현듯 가을에 우리 가족들 생일이 몰려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도 오늘 다녀온 무궁화는 훌륭했다. 메뉴와 메뉴 사이의 서빙 시간이 좀 긴 느낌이 있긴 했지만, 음식의 퀄리티나 분위기나 직원의 친절도가 전반적으로 훌륭했다. 롯데호텔 38층에서는 내 전 직장과 전전 직장이 모두 보였다.
재작년 아빠 환갑 생일 때 재미를 봤던 레터링 케이크를 이번에도 주문했다. 그때는 인천까지 가서 픽업해 왔었는데, 이번에는 언주 역 근처의 수제 케이크 가게에서 주문을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케이크가 예쁘게 잘 나와서 만족스러웠다. 주말에는 친한 친구를 데리고 종로3가 귀금속 거리로 가 엄마에게 선물해 드릴 목걸이를 골랐다. 디자인은 18k가 더 화려했지만, 엄마가 여지껏 악세사리를 하는 걸 본 적도 없고 엄마의 취향은 더더욱 모른다. 고심 끝에 감가가 없는 순금으로 소재를 골랐고, 절을 좋아하는 엄마를 떠올리며 불교와 관련된 상징을 택했다. 다행히 엄마는 오늘 매우 만족해 하셨다. 뿌듯했다.
내일 외래가 있어서 본가로 돌아가서 하룻밤을 청할 계획이었다. 집을 나설 때 혹시 모를 긴급한 업무를 대비해서 노트북과 마우스까지 다 챙겨나왔었다. 그런데, 전자담배를 피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엄마에게 쓴 편지를 전해주고 나서도 같이 집으로 향한다는게 조금 어색해서였을까,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내일 집으로 시간 맞춰서 간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자기 고백은 언제나 부끄러운 일이다. 뭐, 그 덕분에 모기에게 몹시 시달리고 있으니 선택의 무게에 비해 대가가 다소 가혹한 듯 싶다.
아, 최근에는 카카오 장기에서 14급까지 급수를 올리기도 했다. 여지껏 최고 기록이 16급이었는데 정말 괄목할 만한 성장이었다. 14급, 15급의 사람들은 한 수 한 수를 참 신중하게 둔다. 그리고 허투루 두는 수가 없다. 며칠을 못 버티고 다시 강등되기는 했지만, 많이 배웠다.
애플뮤직 구독을 종료하고 다시 지니로 돌아왔다. 애플뮤직의 플레이리스트가 조금 아깝긴 하지만, 당장 빠져나가는 몇 천원이 더 아까웠다. 그 덕분에 좋은 변화도 있었다. 어렸을 때 즐겨 듣던 시부야케이 음악들이 떠올라 다시 찾아듣는 중이다. Free Tempo나 Fantastic Plastic Machine의 음악을 다시 듣고 있노라면 학생 때 가을밤의 부질없는 상념에 얕은 열병을 앓던 것이 떠오른다. 생각이 날 때 Daishi Dance의 노래도 찾아들어봐야겠다.
일상을 회복하고 있다. 더디긴 하지만, 확실히 회복되고 있다. 가을밤은 깊어져 간다, 모기 물린 자국과 쇄골의 흉터를 내 몸에 아로새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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