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Overseas

2023 남미 여행 [Day.16]

무소의뿔 2023. 4. 29. 05:15

23. 4. 25. 화요일

새벽에 서양 형님들이 부시럭대는 소리와 불빛에 깨서 나도 급하게 짐을 정리하고 산행을 준비했다. 사실 야간 산행을 위한 준비는 전혀 안 했지만, 뭐 특별히 어려울 것 있겠냐는 생각에 무턱대고 산행을 시작했다. 아이폰 후레쉬로 길을 더듬어가며 산길을 올라가는데,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나간다는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길을 잘못 들어 물 웅덩이에 신발을 푹 담그기도 했다. 한 손에는 등산 스틱 두 자루를 쥐고, 다른 한 손에는 후레쉬를 비추며 힘겹게 산행을 이어갔다. 길을 나서기 전 은하수를 보고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가이드북에서는 분명 토레스 전망대까지 1시간 30분이면 된다고 했는데, 아무리 길을 가도 끝이 보이지가 않았다. 전망대에 오르기까지 결국 2시간이 넘게 걸렸고, 정상에 다다를 무렵 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전망대에 올랐다. 국립공원 입구에서 칠레노 산장까지 가는 길이 너무 평탄해서였나, 새벽에 이렇게 험난한 등정을 할 줄은 미처 몰랐었다. 트레킹이라고 해서 그냥 평지길을 계속 걷는 줄만 알았는데, 전망대에 오르는 길은 해발고도로 치면 거의 관악산 정상에 오르는 정도의 높이였다. 전망대에 올라 초콜렛 과자를 급히 먹으며 당을 보충해 본다.

토레스 전망대에서 본 그 유명한 토레스 델 파이네의 삼봉. 어제 비가 왔었다는 사실을 말끔히 잊게 만드는 맑은 하늘과 일출의 햇빛을 받아 붉게 타오르는 삼봉의 모습이 정말 절경을 이룬다. 서양 형님들 따라 야간 산행을 감행한 보람이 있다. 삼봉 아래로는 빙하가 녹아 만들어진 호수가 있다. 호수와 삼봉이 어우러져 대자연 그 자체를 절절히 드러낸다.

영하에 육박하는 매서운 날씨인데, 수영복을 입고 호수로 뛰어드는 또 다른 서양 형님들. 진짜 그 패기와 열정이 부러웠다. 수영복이 있었다면 나도 한번 들어가 봤을텐데 하고 아쉬움만 달래본다.

하산하는 길에 새벽에 봤던 이정표를 다시 본다. 분명히 오를 때에는 전망대까지 15분이라는 안내 문구밖에 없었는데, 그 사이에 누가 1시간이라고 친절하게 업데이트를 해 주었다. 잘한 일이다. 진짜 15분이면 갈 줄 알고 희망에 부풀었었는데, 오르고 올라도 끝이 안 보여 절망했었단 말이다.

칠레노 산장으로 돌아와 짐을 챙기고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선다. 사실 본격적인 트레킹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토레스 전망대를 다녀오느라 4시간 이상을 걸어서 꽤나 피곤했지만, 오늘 프랑스 산장에 체크인을 해야 하기 때문에 부단히 걸어야 한다. 이날 총 30km를 트레킹했다.

칠레노 산장으로 빠지는 분기점까지 다시 돌아왔다. 이제부터는 갈림길이 없기 때문에 앞에 놓인 길만 잘 따라가면 된다.

완만한 길을 따라 걸으며 파타고니아의 가을을 느껴본다. 침엽수와 단풍이 많은 우리나라 산에 비해 토레스 델 파이네에는 우선 강렬한 색감의 단풍이 드물고 비교적 색이 옅다. 그리고 바람이 많이 불어서인지 나무들이 다 키가 작고 옆으로 길게 퍼져 있는 모습이다. 설산과 붉게 물들어가는 단풍이 조화롭다.

고개를 왼편으로 돌리면 넓은 호수가 펼쳐진다. 오른쪽엔 설산, 왼쪽엔 호수를 끼고 걷는 트레킹 길은 정말이지 고즈넉하고 청량하다.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그야말로 대자연 속에 홀로 남겨져 정취를 즐길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트레킹을 하기 때문에, 오후가 되면 이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지역이라 그런지 바위와 돌이 많고, 나무가 뿌리내리지 못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민둥산이라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고, 그 나름의 조화와 멋이 느껴진다.

하늘은 어찌나 푸르고 호수는 또 얼마나 깊은지. 길을 걷다가 황홀경을 만나면 우선 핸드폰을 꺼내서 촬영을 하게 된다.

초콜렛이 범벅이 된 도넛류의 간식. 생각보다 맛이 좋아서 만족스러웠다. 걷다가 쉬고 싶으면 바위에 걸터앉아 과자를 꺼내 먹으며, 젖은 양말과 신발을 틈틈이 말린다.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에서는 나무가 좌우로 넓게 뻗는다. 파타고니아의 나무가 딱 그러하다. 잎을 이미 많이 떨군 나뭇가지에서 겨울을 대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 마음대로 초코케잌 산이라고 이름을 붙여본다. 하얀 빵 위로 초콜렛이 얹혀져 있는 듯한 케이크의 모양을 하고 있는 듯하다.

프랑스 산장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쿠에르노 산장을 경유한다. 쿠에르노 산장은 이미 폐장을 해서 문을 다 닫은 상태. 이제 슬슬 해가 질 무렵인데, 걸어도 걸어도 끝이 안 보여서 조금은 걱정했었지만 쿠에르노 산장을 찾고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쿠에르노 산장의 공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트레킹에 나선다. 이제 Sector Frances에 진입했으니, 곧 있으면 프랑스 산장에 도착할 수 있다.

가는 길에 호숫가에도 들릴 수 있었다.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 공원은 일일 입장객 수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어서 대체로 자연 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다. 호수의 물도 정말 티끌 하나 없을 만큼 맑고 깨끗했다.

슬슬 해가 지려하는 모습이다. 호수 너머 언덕에 비친 산 그림자가 곧 밤이 다가옴을 알리고 있다.

장장 30km의 여정을 마친 후에야 드디어 프랑스 산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프랑스 산장은 호숫가를 바로 끼고 있어서 경관이 참 좋았는데, 캠핑 사이트는 상대적으로 숲 안 쪽으로 위치해 있고 도미토리는 호숫가에 위치해 있다. 체크인을 마치고 배정된 방으로 향했는데, 뭔가 우주선 같은 느낌이 난다.

전날 내린 비의 여파로 트레킹 루트에 물 웅덩이가 많았는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비슷했나 보다. 화로에 옹기종기 모여 신발을 말리는 광경이다. 사실 화로 자체를 본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샤워를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하면서 맥주를 곁들였다. 칠레노 산장에서는 캔맥주를 팔았는데, 프랑스 산장에서는 병맥주를 판다.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는 쓰레기를 모두 직접 본인이 챙겨서 가야하는데, 산장에서 파는 맥주 캔이나 병은 산장에서 직접 처리한다.

같은 방에 한국인 남성 여행객 한 분이 머물렀는데, 이 분은 취사 도구를 렌탈해 오셔서 직접 라면을 끓여 드셨다. 덕분에 나도 라면 한 젓가락을 할 수 있었는데, 정말이지 어둠이 내린 호숫가에서 먹는 라면 맛은 환상적이었다. 나도 다시 트레킹을 한다면 침낭 말고 취사 도구와 라면을 챙길 것이다.

새벽 등산을 하느라 꽤나 길고 피곤한 하루였다. 내일은 아침 늦게까지 푹 잠을 자고 여유롭게 트레킹을 해야지 다짐을 하며 잠에 드는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의 이튿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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