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4. 26. 수요일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의 3일차 아침이 밝았다. 토레스 델 파이네는 경도상으로는 수도인 산티아고와 비슷하지만 한 시간 느린 시간대가 적용된다. 그래서 8시가 넘어야 해가 뜨고 7시가 지나야 해가 진다. 8시 반 정도에 느지막히 일어났는데 막 호수 너머로 동이 트고 있었다.

간단하게 짐을 정리하고 3일차 트레킹에 나섰다. 오늘은 프랑스 전망대(Mirador Frances)와 영국 전망대(Mirador Britanico)를 오른 후 파이네 그란데 산장까지 이동하는 여정이다. 그새 해가 다 떠서 호수와 하늘이 맑게 펼쳐진다.

어제보다는 날이 흐려서 구름이 조금 낀다. 고도가 조금만 높아져도 이렇게 하얗게 죽어있는 고목들을 자주 볼 수 있다.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침엽수림. 역시 낮고 넓게 펼쳐져 있는 모습이 꼭 한라산 고지대의 수목을 연상시킨다.

프랑스 산장에서 1시간 정도를 걸어서 이탈리아노 캠프에 도착했다. 이탈리아노 캠프는 무료 캠핑장으로 운영된다. 여름 시기에 토레스 델 파이네를 온다면 이탈리아노 캠프에서 캠핑을 하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탈리아노 캠프에서 프랑스 전망대까지는 다시 2km 거리인데, 오르막을 오르는 구간이라 만만하지는 않다.

이탈리아노 캠프에 배낭을 보관하고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간단한 짐만 챙겨서 등정을 준비한다. 여기서는 전망대에 오르는 길이 험하기 때문에 등짐을 지고 산을 오르는 이는 아무도 없고, 배낭을 굳이 훔쳐가는 사람도 없다. 등정 전 초콜렛 과자로 당을 급하게 충전해 본다.

숲 사이로 잘 조성된 길이 모험의 시작을 알리는 듯하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결빙된 구간이 늘어난다. 이곳의 얼음은 희한하게 뾰족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어떤 원리인지 궁금하지만 지질학에 무지하고 인터넷도 안 되서 이유를 알 방법이 없다.

이탈리아노 캠프에서 1시간 정도를 올라 프랑스 전망대에 도착했다. 설산의 구석구석을 채운 눈과 얼음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눈이 깊게 쌓인 곳은 하늘색 빛이 비친다. 중간중간 눈이 녹아 폭포로 흐르는데, 그 물들이 모여 계곡으로 가고 종국에는 호수에 다다른다.

우리나라 산에서는 겨울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매력적인 설경이다. 수량이 풍부한 기간이 아니라 그런지 눈의 양이 다소 아쉬웠지만, 그런대로 또 멋스럽다.

프랑스 전망대에서 영국 전망대까지는 다시 3km 거리이다. 영국 전망대에 오르기까지 한 시간 반 정도가 더 걸렸는데, 가는 길에 계곡에 들러 사진을 남겨본다.

확실히 고도가 높아지니 앙상한 나무들이 많다. 끝부분에만 간신히 잎사귀들이 매달려 있고, 바닥엔 낙엽이 잔뜩하다. 이곳 나뭇잎들은 다 크기가 작아서 마치 풀잎 같다. 곧 다가올 겨울을 예고하는 듯한 자태이다.

조금 더 가면 나무조차 듬성해진다. 여기서부터는 모종의 황량한 느낌을 자아낸다. 토레스 델 파이네의 깊숙한 곳으로 다가갈수록 인간과 생명을 허락치 않는 듯한 느낌이다.

영국 전망대에 드디어 올라서 서편의 설산을 바라본다. 뾰족하게 우뚝 솟은 봉우리가 늠름하다.

북녘을 바라보면 화산의 흔적이 보인다. 풀조차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단단한 바위산이 굳건하게 서 있다.

전망대를 알리는 안내판이 부러져 있다. 등정 기념으로 사진을 한 컷 남겨보았다.

하산하는 길에 구름과 하늘이 멋드러지게 펼쳐진다.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이다.

고도가 낮아질수록 추위는 덜해지고 하늘도 개어간다. 호수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캠프가 멀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든다. 영국 전망대를 오르내리는데 이렇게 많은 시간이 소요될 줄 모르고 점심을 이탈리아노 캠프에 두고 와서 몹시 허기가 지는 상태였다.

이탈리아노 캠프에 다시 도착했을 때는 4시 정도였다. 점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지만 재빨리 요기를 했다. 이때부터 파타고니아 특유의 거센 바람이 시작되었는데, 바람이 불기 전까지는 잘 몰랐지만 정말 바람이 너무 거세서 몸을 가누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왠만한 물건은 다 쓸려 날아가고, 서서 중심을 잡기조차 힘들었다. 왜 토레스 델 파이네의 나무들이 다 낮고 넓게 펼쳐져 있는지 여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파이네 그란데 산장까지는 7.5km 거리니까 천천히 걸어도 두 시간 반이면 갈 수 있다. 휴식 시간을 고려하더라도 해가 지기 전에 산장에 도착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고, 토레스 델 파이네의 풍경을 즐기며 산행을 이어나갔다.

깎아지르는 듯한 설산의 모습도 좋았지만, 나는 고즈넉하게 펼쳐진 호수가 더 눈에 들어왔다. 물결이 살랑이는 호수를 보며 걷는 길은 가을의 정취가 듬뿍 느껴진다.

오후 내내 나의 시선을 사로 잡았던 삼단 구름. 마치 팬케이크를 쌓아둔 듯한 모습이다.

호수와 초코케잌 산을 한꺼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이름으로 봐서는 독일이나 북유럽계 사람이 발견한 곳인 듯하다. 이곳 토레스 델 파이네는 칠레의 땅인데 프랑스 산장이니 이탈리아 캠프니 하는 이름들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나라로 치면 설악산에 대청봉, 소청봉 대신 중국봉, 일본봉 이런 이름이 붙은 셈인데, 뭔가 남미의 역사와 맞물려 생각해보니 조금 씁슬하다.

땅거미가 저물 즈음 파이네 그란데 산장에 도착했다. 파이네 그란데 산장은 칠레노 산장이나 프랑스 산장보다 훨씬 규모도 크고 시설도 잘 갖춰져 있었다. 아무래도 많은 트레커들의 1일차를 책임지는 곳이고 국립공원의 가장자리에 있다보니 물자 보급이 원활해서인 듯하다. 칠레노 산장을 생각해보면 파이네 그란데 산장은 거의 신식 건물처럼 느껴진다.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으러 1층으로 내려왔다. 오늘 트레킹도 25km를 걸었는데, 샤워까지 다 마치고 나니까 다리가 완전히 맛이 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무릎 주변의 인대와 허벅지 근육에서 염증 반응이 느껴졌고, 단순하게 다리를 굽혔다 펴는 동작이 매우 고통스러웠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식욕마저 없는 상태였지만 그대로 잠들기는 아쉬워서 1층으로 내려가 와인을 살펴보았다. 맥주를 마실 수도 있었지만, 칠레에 와서 와인을 한 잔도 안 마셨다는 생각이 스쳤고 와인을 한 잔 주문했다.

칠레가 다른 물가는 다 비싸도 와인은 참 싸다고 하던데, 여긴 산장이라 와인도 그닥 싸지 않다. 한 잔에 6,000 페소 짜리 와인이다. 와인 한 잔을 마시며 휴식을 취해본다.

칠레노 산장과 프랑스 산장에서는 침낭이 포함된 도미토리를 예약해 두었어서 가져온 침낭이 의미가 없었는데, 파이네 그란데 산장은 침낭 불포함으로 예약을 했었다. 그래서 3일만에 처음으로 가져온 침낭을 펼쳐서 깔았다. 하지만 방 안의 난방이 잘 되어 있어서 침낭을 덮어야 할 정도로 춥지는 않았고, 침낭 속에 웅크리는 대신 침낭을 이불처럼 쓰는 것을 택했다. 이날은 다리가 몹시 아파서 밤에 깊게 잠들지 못하고 자주 깨곤 했다. 이렇게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의 3일차가 마무리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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