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Overseas

2023 남미 여행 [Day.15]

무소의뿔 2023. 4. 29. 01:50

23. 4. 24. 월요일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토레스 델 파이네로 떠나는 날!!!! 우선 일어나서 간단한 호텔 조식을 먹고 정성스러운 샤워를 마쳤다. 3박 4일 동안의 산장 생활이 예정되어 있으니 뜨거운 물을 즐길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겨놔야지. 트레킹에 불필요한 짐은 따로 빼서 호텔에 보관해두고 침낭과 타월 그리고 옷가지만 챙겼다.

가이드북에서 말하길 시내에서 먹을거리를 미리 챙겨가는 게 좋다는 조언이 있어서, 시내의 대형 마트에 들렀다. 여기서 감자튀김과 닭다리 요리, 감자무스와 돼지고기 요리, 그리고 바게트와 초콜릿 과자류를 잔뜩 사서 배낭에 실었다. 가방이 가득 찼지만, 설레임도 그만큼 가득 찼다.

나탈레스에는 귀여운 모양의 쓰레기통이 곳곳에 있다고 한다. 나는 하나만 발견했다.

어딘가 황량하고 쓸쓸한 파타고니아의 가을이다. 남반구는 진짜 가을이구나. 서울은 봄이 한창인데 말이다.

다시 나탈레스 버스 터미널로 왔다. 토레스 델 파이네로 가려는 트레커들로 터미널이 붐빈다.

터미널 안 매점에서 간단하게 포장된 샌드위치를 판다. 오늘부터 많이 걸어야 하니까 든든하게 샌드위치 2개와 아메리카노 하나를 주문해서 요기를 한다.

버스 수르를 타고 토레스 델 파이네까지는 약 2시간이 걸린다. 대부분 서쪽에서 동쪽으로 트레킹하는 루트를 선택하지만, 나는 산장 예약 마감 시기와 겹쳐서 어쩔 수 없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트레킹하는 코스를 짰다. 그래서 내 목적지는 Lago Amarga이다. 가는 길에 귀여운 파타고니아 소들을 보았다. 여기 소들은 신기하게 얼굴만 하얗고 몸은 검거나 갈색이다. 우리에 갇혀 지내지 않는 모습이 자유로워 보였다.

드디어 국립공원 안내소에 도착했다. 미리 입장권을 구매한 사람들은 간단하게 구매한 티켓을 보여주면 되고, 입장권을 구매하지 않은 사람은 내려서 사무소에 들러 표를 사야 한다. 나는 미리 인터넷으로 입장권 티켓을 끊어놓았고, 버스에 올라온 직원이 QR 코드를 확인하는 것으로 입장 절차는 간이하게 마무리되었다. 가이드북에서는 3일 이상일 경우 49$를 내야 한다고 되어 있었는데 나는 3박 4일인데도 35$에 입장권을 구매할 수 있었다. 가격이 할인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잘 된 일이다.

표 검사를 마치면 Las Torres Hotel까지 걷거나 셔틀 버스를 탈 수 있다. 셔틀 버스는 3,000 페소인데, 미리 이용권을 예매할 수도 있고 현장 예매도 가능하다. 나는 현장 예매를 했다. 셔틀 버스를 기다리며 파타고니아 풍경을 사진에 담아본다.

셔틀 버스 입장권. 만약 셔틀을 타지 않고 걷는다면 약 1시간 반을 걸어야 한다. 체력을 아낄 겸 셔틀 버스를 탔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스페인어를 한마디도 못 해서 당황하고 있는데, ‘로드리고’라는 이름의 칠레 청년이 영어가 되서 도움을 얻었다. 셔틀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 다시 안내소 같은 곳이 나오는데, 여기서 커피나 과자를 주문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이 시작된다고 보면 된다. 칠레 친구는 근처의 센트럴 산장을 예약했다고 하고, 나는 칠레노 산장을 예약했다. 작별 인사를 나누고 다시 만나길 서로 기원했다. 이후 우리는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몇 번 다시 만났다.

이제 인터넷도 안 되고 믿을 것이라고는 오로지 길 중간중간 나 있는 이정표 뿐이다. 다행히 이정표가 잘 갖춰져 있어서 길을 찾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오전에 날이 좀 흐리더니 오후부터는 하늘이 개기 시작한다. 가자 칠레노 산장으로!!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은 W 트레킹이라고 불리는 70km 코스와 O 트레킹이라고 불리는 280km 코스 두 가지가 있다. 당연히 나는 W 트레킹 코스를 택했다.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한 번도 묶지 않았던 허리와 가슴 끈을 조였다. 이제부터는 진짜 트레킹 시작이니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아주 오랜만에 무지개를 보았다. 저 언덕 너머에 큰 호수가 있는데, 하늘이 개면서 호수 위로 무지개가 떴다. 살면서 지금까지 본 무지개 중에 가장 선명했다. 뭔가 상서로운 느낌이 물씬 풍겨온다.

저지대는 볕이 강해서 약간 더울 지경인데, 저 너머에는 설산이 우뚝 솟아있다. 참으로 이색적인 광경이었다.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 공원은 중심부의 빙하와 설산을 중심으로 둘레길처럼 트레킹 코스가 나 있어서 파타고니아의 가을과 겨울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

조금 언덕을 오르니 탁 트인 시야와 함께 멀리 호수가 보인다. 산과 호수와 이국적인 남반구의 식생이 조화를 이루어 절경을 선보인다.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지형이라 그런지 바위와 돌이 많고 흙이 드물다. 산과 산 사이로는 빙하가 녹아 만들어진 계곡물이 흐른다.

파타고니아의 자연 환경은 너무나 깨끗해서 아무 물이나 바로 떠서 마셔도 된다고 한다. 그 말만 믿고 페트병 하나만 달랑 들고 출발했다. 물이 시원하고 맛이 좋다. 정말 때묻지 않은 맑은 자연 그 자체이다.

중간중간 과자를 먹는 게 도움이 되었다. 우니마크 마트에서 산 초콜렛 과자인데 오레오와 비슷한 맛이 났다.

아침까지 비가 와서 그런지 유속이 상당하다. 여름이면 발이라도 한 번 담가봤을텐데, 파타고니아는 지금 늦가을이라 꽤 쌀쌀하다.

약 2시간을 걸어 칠레노 산장에 도달했다. 등짐을 지고 길을 걷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2일차부터 시작될 진짜 여정에 비하면 오늘의 트레킹은 아무 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칠레노 산장에 막 도착했을 때는 어찌나 기쁘던지, 염화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상상하던 것과 현실은 달랐다. 산장에 머무른 것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설악산에서의 경험이 전부라서 그와 비슷한 풍경을 막연히 상상했었는데, 생각보다 규모도 크고 설비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산장은 텐트를 치고 숙박하는 Camping Site와 침대가 있는 6인실인 Dormitory 2가지 타입이 있는데, 나는 돈을 더 쓰더라도 보다 안락한 환경을 위해서 Dormitory를 예약했다. 하룻밤에 125$라는 무지막지한 비용이지만, 산 속에서는 부르는 게 곧 값이다.

원래는 1일차에 토레스 전망대까지 오르는 것을 목표로 하였지만, 산장에 도착했을 때가 이미 5시였고 입산 통제 시간에 걸려버렸다. 1일차에 한 게 너무 없는 것 같아서 조금은 아쉬웠지만, 토레스 전망대는 내일 오르기로 하고 짐을 풀고 정비를 했다.

산장에서는 와이파이가 유료로 제공되는데, 상당히 비싸다. 1시간에 8,500 페소 정도이고 3시간에 12,000 페소 정도이다. 1시간 이용권만 구매해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앞으로 3일간 연락을 못 할 것임을 고지하고 이것저것 필요한 정보들을 갈무리한다. 꼭 어렸을 때 주말에 시간을 정해놓고 컴퓨터를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저녁을 먹으며 곁들인 파타고니아 맥주.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도수 차이라고 한다. 이것저것 다양한 맥주를 마셔봤지만 Patagonia Austral은 처음이었다. 물론 산장에서는 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저 맥주만 파니까 말이다. 가격은 1캔에 6,000페소로 역시 싸진 않다.

우니마크 마트에서 사온 저녁. 산장에서 식기를 빌려 식사를 했다.

술이 술을 부른다. 1캔으로 끝내긴 아쉬우니 1캔을 더 주문했다.

시내에서 침낭을 빌려 왔었는데, 침낭이 포함된 숙소를 예약했었다. 아, 괜히 무겁게 침낭을 나르느라고 돈과 에너지를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와서 어쩔 수도 없다. 침낭에 들어가 누우니 세상 편안하고 안락하다. 같은 방을 쓰는 서양 형님들이 자기들은 내일 아침 토레스 전망대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5시 반에 알람을 맞추고 일어날 건데 괜찮겠냐고 물어왔다. 원님 덕에 나발 분다고, 나도 그러면 그때 같이 일어나 일출을 보러 토레스 전망대로 올라야겠다고 생각하고 취기의 도움을 받아 일찍 잠에 들었다. 이렇게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의 첫날 밤이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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