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한 주 동안 재택근무를 이유로 참 편하게 지냈다. 매일 9시간이 넘게 숙면을 취하고, 조금 먹고, 조금 운동하고, 주로 침대에 많이 누워 있었다. 추위가 조금은 가신 걸까, 낮에는 밖에서 활동하기에 썩 불편하지는 않은 온도였다. 조금은 무료하고 우울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차분한 한 해의 마무리였다.
오늘은 드디어 2022년의 마지막 날이다. 곧 저녁에 외출하기 전에 굼뜬 몸을 일깨워 본다. 오전에는 커피를 마시며 영화 코코를 봤다. 다음주부터는 독서/영화 모임에 나가보기로 했다. 예전부터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신년에는 한 번 건전한 자극으로 나를 채워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엄마가 구운 바게트 빵과 우유, 닭가슴살 그리고 계란 후라이로 간단하게 점심을 먹는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다음주 필리핀으로 여행을 떠나는 엄마를 위해 온라인 입국 심사를 도와드렸다. 영어 공부를 꾸준히 하는 엄마이지만 아직 편하게 온라인 입국 심사를 마칠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지 않은 엄마다. 국적란에 하마터면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을 쓰려던 것을 대한민국으로 바꾸어주었다.
다시 침대에 누워 조금만 더 뒹굴거려야지. 이불 속은 내 체온으로 꽤나 따듯하게 뎁혀져 있다. 전기장판을 일부러 안 깔았는데, 처음엔 조금 차가웠던 침대가 점차 따듯해지는 느낌이 좋다. 2시 반, 더는 미뤄서는 안 되겠지.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치고 온몸 구석구석 바디로션을 바른다. 태닝샵에서 쓰던 코코넛 향의 바디로션이 아직도 꽤 많이 남아 있다. 내년 봄이 올 때까지도 너끈할 것 같다.
3시, 집을 나선다. 먼저 동네 교보문고로 향한다. 김영민 교수가 쓴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드디어 다 읽었다. 교보문고를 지날 일이 있을 때마다 틈틈이 집어들어 읽던 것이 어느새 책 한 권을 다 읽게 되었다. 올해 읽은 책 중에 가장 울림이 있었다. 지식과 정보를 내 머릿속에 욱여넣기 위한 읽기가 아니었다. 문장과 문장 사이를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음미했다. 평이한 문체 속에 꾹꾹 눌러담은 생에 대한 작가의 통찰과 사색을, 나도 한 호흡씩 따라가본다. 생의 무목적성과 무심함에 관한 실존주의적 고찰의 파편 정도라고 이 책을 정리하고 싶다.
읽기를 마치고 근처 백화점 매장을 둘러본다. 내일모레부터 아침 수영을 나가야 하는데, 수경이 없다. 백화점에는 수영용품을 파는 매장이 한 군데는 있겠지, 정확하게는 '아레나' 매장이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돌아보는데, 없다. 이런... 너무 안일했다. 한 군데 백화점을 더 돌아봤지만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없다.
원래대로였다면 나의 지금 외출은 목적 달성에 실패한 외출이라고 평가했겠지만, 김영민 교수의 책을 읽고 나니 마음이 누그러진다. 그래, 그냥 2022년 마지막 날 꽤나 포근했던 오후의 산책이라고 치자. 수경은 어차피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그만이다. 집에 돌아와 주문을 마치고, 갑자기 일기를 쓴다.
2022년이 이렇게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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