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함덕에 다녀오다

무소의뿔 2022. 4. 11.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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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여행다운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다운 여행이란 무엇일까. 잠시 고민해 본다. '여행'과 달리 '여행답다'를 정의내리기란 쉽지 않다. 일상과의 분리, 낯선 공간, 나를 구성하는 여러 감각들과 사념들을 털어내고 새로운 자극으로 나를 채워나가는 과정. 뭐, 어떻게 정의내리든 상관 없다. 나는 비행기를 탔고, 제주에 왔으며, 그 중에서도 함덕으로 왔다.

함덕으로 정한 이유는 오직 바다이다. 지난 추석 3박 4일간의 제주도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제주도의 거의 모든 바다를 둘러보았다. 서쪽의 창창한 푸른 바다부터, 태평양과 닿아 있는 남쪽의 깊은 바다, 햇살을 머금어 따듯한 동쪽 바다, 그리고 바람이 시원한 북쪽 바다까지, 제주의 사면을 둘러보면서 바다란 바다는 원 없이 만끽했었다. 소중한 추억이다.

함덕해변은 지난 여정의 말미에 마주했다. 이미 자전거를 오랫동안 타온 뒤라 몸과 마음이 꽤나 많이 지쳐 있는 때였는데도, 함덕과 마주하는 순간 새로운 기운이 내 안에 솟아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에메랄드 빛의 얕은 바다는 서우봉을 오른편에 끼고 작은 만을 그리고 있었다. 

여행은 특별한 일정 없이 지나갔다. 애초에 일정을 계획하지도 않았다. 챙겨온 거라곤 야상 한 벌과 바람막이 한 벌, 갈아입을 티셔츠와 톨스토이 단편선이 전부였다. 톨스토이 단편선은 이번 여행에서 완독을 목표로 한 권 사왔는데, 단편소설 3개를 읽는 데 그쳤다. 그래도 상관 없다. 3편을 읽나, 모든 편을 다 읽나 달라질 것은 없다.

술이 마시고 싶을 때는 술을 원 없이 마셨다. 잠을 자고 싶을 때는 잠을 원 없이 잤다. 바다가 보고싶을 때는 바닷가에 하염없이 앉아서 담배를 태웠다. 말하고 싶을 때 말했고, 침묵하고 싶을 때 침묵했다.

비우려고 내려온 바다였는데, 비워지진 않았다. 내 안에 오래된 아집처럼 머물고 있는 사념, 상념, 잡념들. 외과의사가 악성 종양을 수술하듯 깨끗이 도려내고 싶었는데, 며칠짜리 여행으로는 충분치 않나보다. 그리고 원래 생각이란 것은 그 생각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달아나는 속성이 있기에, 어떠한 생각을 머릿 속에 붙잡아 두고 치열하게 고민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다.

새로 뭔가를 채운 것도 없다. 비워지지가 않았는데 채워질리가 있을까. 어쩌면, 문을 열지 말지를 고민하기 위해 제주로 내려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열린 문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훨씬 마음이 편했을까. 웃을 일도 울 일도 아닌,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그런 건조하고 무미한 마음으로 함덕에 머물렀다. 햇살만이 오직 따스했을 뿐이다.

그렇게 나는 4월을, 봄을 맞이했다. 이것이 내게 주어진 삶의 길이라면 받아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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