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에 영화를 봤다. 삼일절이라 휴일인데 더배트맨을 볼까 말까하고 엄청 고민하다가 결국 두 번의 예매취소와 세 번의 예매 끝에 저녁 영화로 보고 말았다. 나는 삼일절에 봤는데, 왜 포스터에는 3월 4일이라고 써 있을까? 미국에서는 3월 4일에 개봉하려나보다.
전반적으로 화면의 질감은 조커의 그것과 비슷했다. 어렸을 때 다크나이트 시리즈를 정말 재밌게 봤었는데, 그때와는 tone and manner가 완전히 달라졌다. 훨씬 우울하고 가라앉아 있다. 조커의 연장선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다만, 스토리의 흡인력은 조커에 다소 미치지 못하였다. 조커라는 캐릭터의 탄생 서사가 훨씬 설득력 있고 매력적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미친 광대가 희대의 살인마가 되는 이야기가 웨인 가문의 유복한 고아가 정의의 수호자가 되는 이야기보다는 훨씬 친숙하게 다가온다. 그래도 영화 속에서 브루스 웨인이 그저 평면적인 인물로만 묘사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캐릭터의 입체감이 살아나기에는 서사의 힘이 다소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복수다'로 시작해서 '희망'을 노래하는 재난 영웅으로 브루스 웨인은 진화해나가지만, 그 전환은 영화의 거의 후반부에 다다라서야 이루어졌다.
러닝타임이 3시간으로 상당히 길다는 점도 내러티브의 박진감을 저해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영화를 보면서 시계를 두 번 봤는데, 각각 한 시간씩이 흐른 시점이었다. 처음 한 시간 동안이 제일 지루했던 것 같고, 그 다음 두 시간은 그럭저럭 속도감 있게 전개를 펼쳤다. 하지만 조커를 보는 약 두 시간 반의 러닝타임 동안에는 한 번도 시계를 쳐다보지 않았던 것 같다.
출연진 정보조차 확인 안 하고 예고편도 안 보고 무작정 감상 후에 배트맨을 찾아보니 로버트 패틴슨이었다. 테넷에서 꽤나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었는데, 더 배트맨에서는 크리스쳔 베일과는 확실하게 다른 연기 색깔을 보여줬다. 확실히 퇴폐미가 있는 배우다.
캣우먼은 사실 영화 내에서 캐릭터가 애매했다. 확실한 반동인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확실한 주인공의 조력자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극의 흐름을 다소 저해했다. 그런 영화적 표현 자체가 배트맨의 동료이면서도 배트맨과는 다른 자유분방함을 추구하는 캣우먼의 성격을 나타내는 장치였겠지만, 오히려 극의 서사를 풀어나가는 데는 마이너스 요소가 아니었나 싶다.
리들러가 미친 연쇄살인마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내게는 설득력이 부족했다. 재개발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얽히고 섥힌 인물들 간의 복잡한 관계성이 오히려 리들러의 존재감을 약화시키는 요소였다. 오히려 중후반부부터 집중 조명된 팔코네에 관한 내러티브를 더 살렸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와는 별개로 리들러 역을 맡은 배우 폴 다노의 연기는 일품이었다. 복면을 쓰고 저음으로 목을 긁으며 소리를 낼 때는 톰 하디가 연기한 베인을 연상시키다가도, 복면을 벗었을 때의 선한 얼굴은 반전적인 요소가 있어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개인적으로 최고의 장면을 두 개 꼽으라면, 우선 자동차 추격신에서 배트맨을 따돌렸다고 생각하고 기쁨에 포효하다가 화염 속에서 배트카와 함께 날아오르는 배트맨의 모습을 본 펭귄의 얼굴을 들고 싶다. 진짜 'X됐다'를 압축적으로 잘 표현해냈다. 또 한 장면은 배트맨이 단신으로 팔코네의 클럽으로 쳐들어가 어둠 속에서 총격을 맨 몸으로 받아내며 적들을 제압하는 씬이다. 다크나이트 시리즈에 비해 격투 씬 자체는 다소 투박하고 육탄전에 가깝지만, (개인적으로 DC 세계관을 잘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 총을 몸으로 이겨내고 적들을 제압하는 장면은 참 인상적이었다. 총구의 단말마와 같은 빛과 어둠의 반전이 액션의 스펙터클을 한층 고조시켰다.
I'm vengeance. 영화의 가장 핵심이 되는 대사이다. 이 대사와 함께 영화의 도입부와 결말에 반복해서 흐르는 'something in the way' 가 전반적인 영화 속 고담시티와 고독한 영웅의 우울감을 잘 그려낸다. 찾아보니 너바나 노래네. 어쩐지 흡입력이 있다 싶었다.
여담으로, 알프레도를 얼핏 보고 김의성인 줄 알았다... 그리고 고든은 개리 올드만이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올드만이 아닌 고든 너무 낯설다...ㅠㅠ
아무튼 한 줄 평으로 감상 후기를 마치려 한다.
"다크나이트는 잊어라. 새로운 배트맨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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