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4. 17. 월요일
마추픽추 투어를 마치고 다시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에서 기차와 버스를 타고 쿠스코까지 돌아오는 긴 여정이었다. 물론 쿠스코에서 볼리비아 코파카바나까지 거의 12시간이 걸리는 여정이 날 또 기다리고 있었다. 쿠스코에서 시간 여유가 있으면 페루 전통 의상이나 판쵸를 구매할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넉넉지 않아서 그냥 저녁을 먹고 바로 버스에 올랐다.
저녁으로는 버스 터미널 근처 현지 식당에서 pollo를 주문해 먹었다. 아무래도 현지 식당이다 보니 닭이 매우 퍽퍽했다. 우리나라의 치킨 조리 기술에 다시 한번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 닭 요리는 참 촉촉한데 말이다.

터미널에서는 1.5솔의 터미널세를 따로 징수한다. 다른 나라의 세금 체계를 경험한다는 것은 간접적으로 그 나라의 법체계를 경험해보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서 집단을 이루고 그 집단이 나름의 행정력과 체계를 갖추어 굴러간다는 게 어떤 면에서는 참 신기하고 대단한 인류의 힘이다.

쿠스코에서 코파카바나로 가는 버스. 생각보다 버스의 시설이 괜찮고 커서 놀랐다. 라파즈를 거쳐 우유니로 간다는 한국 여행객이 있었는데, 고산병 약을 잃어버렸다며 빌려달라고 해서 내 것을 조금 나눠주었다. 라파즈까지 거진 15시간이고 라파즈에서 우유니까지 10시간이 더 걸리는데 무사히 잘 도착했으려나 모르겠다.

야간 버스에서 정신 없이 곯아떨어졌다. 중간중간 깨기는 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는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동이 터올 즈음에 페루와 볼리비아 국경 근처까지 다다렀다. 원래 이 버스는 코파카바나에 나를 내려주고 다시 라파즈로 향할 예정이었는데(그 말인 즉슨 코파카바나로 가는 사람이 이 버스에서 나 혼자 뿐이었다는 것), 코파카바나 국경 사무소가 폐쇄되는 바람에 인근의 Desaguadero 지역의 국경사무소를 경유해야 했다. 여기서 먼저 페루 출국 도장을 찍고, 택시를 통해 Khasani 지역으로 넘어온 다음 여기서 볼리비아 입국 도장을 찍는 것. 다행히 버스 회사의 과실이 인정되어 카사니 지역까지 이동하는 택시비는 버스 회사가 부담하였다.

이 과정에서 쿠스코에서 3박을 머물렀던 한인 민박 사장님이 많은 도움을 주셨다. 위 과정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주도해주셨는데, 정말이지 스페인어를 한 마디도 못 하는 나로서는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 격이었다. 카사니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코파카바나로 이동해 들어왔다.

하지만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는데, 볼리비아 비자 발급에 숙소 예약증이 필요해서 코파카바나의 호스텔을 한 군데 예약해두었었고 그 호스텔로 체크인을 하러 왔더니만, 리셉션이 전혀 없고 방만 덩그러니 있는 그런 약간 폐허스러운 호스텔이었다. 나를 호스텔까지 태워준 택시 기사가 말하길 자기 여동생이 하는 숙소이고 오후 늦게 숙소로 온다고 했다. 코파카바나와 태양의 섬 관광을 다 마친 뒤의 일이지만, 해질녘이 되니 이 숙소의 안전 상태를 더 이상 신뢰할 수가 없는 지경이 되어 바로 짐을 싸서 선착장 근처의 호텔로 숙소를 옮겼다. 이번 여행 중에 가장 섬뜩했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와는 별개로 코파카바나 여행은 참 즐거웠다. 코파카바나는 작은 항구 도시로 배가 다니는 호수 중에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호수인 ‘Lago Titicaca’를 볼 수 있다. 말이 호수지 눈에 담기는 규모는 거의 바다에 가깝다. 해발 3,000m가 넘어가는 고산 지대에 이런 거대한 호수가 자리해 있다는 그 자체로도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지만, 수려한 경관에 한 번 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인구 1만의 작은 항구 도시라 관광객 수도 그리 많지 않았다. 시장통을 가볍게 둘러보고 대성당도 구경해본다.

태양의 섬(Isla del Sol)으로 가는 1시 반 배편을 끊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라 간단하게 거리에서 쌀떼냐를 비롯한 빵을 사서 요기를 했다.

코파카바나에서 태양의 섬까지는 편도로 1시간 반 정도가 소요된다. 가이드북에서 말한 바와 같이 1층 선실 내에는 기름 냄새가 진동을 해서 2층 갑판 위에 앉았는데, 볕은 뜨겁지만 호수를 헤치며 부는 바람 때문에 몹시 추웠다. 브라질에서 온 여성 여행객 한 분이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워머와 숄을 빌려주었다.

티티카카 호수는 정말 장관이었다. 시간이 없어서 태양의 섬 정상에 오르지는 못하였지만, 언덕 어디에 서든 드넓게 펼쳐지는 티티카카 호수의 때묻지 않은 모습은 아름다움을 넘어선 장엄함이 느껴졌다.




유마니 마을에서 1시간 정도를 머므룬 후 배는 다시 출발하였다. 중간에 잠깐 태양의 신전을 경유해 주었는데, 신전 자체는 대단할 것은 없었지만 다른 뷰 포인트에서 티티카카 호수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다시 코파카바나로 돌아왔을 때는 6시 정도였다. 라파즈로 가는 마지막 버스가 6시 반이라 어쩔 수 없이 코파카바나에 하루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사실 티티카카 호수 말고는 따로 볼 게 없는 마을이라 호스텔 사태도 있고 해서 시간만 맞으면 밤 버스로 라파즈로 넘어갈까도 싶었는데, 인터넷도 잘 안 터지는 데서 다시 그 호스텔을 찾고 짐을 꾸려서 광장으로 돌아오는 게 어려울 것 같아서 시원하게 포기했다. 대신 석양이 지는 티티카카 호수를 조금 더 감상하기로 했다.

선착장 근처의 호텔 아줄에 새로 체크인을 하고 간단히 짐을 푼 다음 저녁을 먹으러 부둣가로 나왔다. 원래 부둣가에는 포차처럼 로컬 식당이 즐비한데, 성수기가 끝나서인지 장사를 하는 가게가 없었다. 대신 관광객용 레스토랑에서 뜨루차와 잉카 맥주를 주문했다.

티티카카 호수에서는 송어 양식을 많이 한다고 한다. 치즈와 마늘로 양념을 한 송어구이와 함께 잉카 맥주를 곁들여 풍성한 저녁 만찬을 즐겨본다. 뜨루차는 신선했고, 잉카 맥주는 탄산감은 거의 없는데 단맛이 강했다.

전날 버스에서 잠을 자서 그런지 여독 때문에 9시 반 즈음 일찍 잠에 들었다. 오늘은 이번 여행 중 가장 다사다난했던 하루로 기억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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