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untain

[한국 100대 명산 정복기] [003] [감악산] 2023. 1. 1. 일.

무소의뿔 2023. 1. 1. 20:00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파주와 양주 접경지역에 감악산이 있다. 2023년 1월 1일이 되면 오르리라 다짐하고, 기어이 올랐다. 집에서 11시 쯤 출발해서 고양을 거쳐 12시에 도착했다. 70km 거리였는데 새해 첫날 오전이라 그런지 차가 전혀 막히는 것이 없어서 좋았다. 감악산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신암저수지까지 걸었는데, 등산로 입구까지 거리가 상당한 것 같아서 빠른 전략적 판단으로 다시 turn back 후 등산로 입구까지 차를 다시 몰고 갔다. 한 30분 정도 손해 봤지만, 그대로 걸어올라갔더라면 더 큰 체력적 손실이 있었을 것이다. 참 다행이다.

추위에 저수지가 꽁꽁 얼어붙었다. 저 멀리 낚싯터에는 이 날씨에도 낚시를 하는 아저씨들이 꽤 있다. 낚시는 뭐가 그렇게 재밌을까? 나는 낚시를 해 본 적이 없어서 낚시의 맛이나 묘는 잘 모른다. 어쩌면 별 이유 없이 낚시를 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내가 산을 오르는 데 별 이유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감악산 등산로 입구이다. 등산할 때와 하산할 때의 길이 살짝 달랐는데, 이 숲길 입구로 오르면 선일재를 거쳐 임꺽정봉을 찍고 감악산 정상에 이르게 된다. 하산할 때는 선일재를 거치지 않고 임꺽정봉에서 바로 감악약수터 쪽으로 내려왔다. 지금에야 이렇게 덤덤하게 말하지만, 하산하면서는 내가 잘못된 방향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꽤나 노심초사했다.

볕이 닿지 않는 곳엔 아직도 눈이 소복히 쌓여있다. 감악산을 오르면서 사람을 총 4명 봤다. 신년 첫날 등산은 아무래도 별로 인기가 없는 종목인가보다. 대신 그 전에 다녀간 이름 모를 누군가들의 발자국을 따라 길과 길이 아닌 곳을 구분하며 걸음을 내딛는다. 눈길이라 한 걸음 한 걸음이 신중하다. 발을 내딛는 그 감각을 지금 글을 쓰며 되새겨본다.

계곡, 혹은 계곡이었던 것. 얼어붙은 바위 아래로 물 흐르는 소리가 시원하다.

선일재까지 오르는 길은 경사가 그리 높지 않다. 눈이 좀 쌓여 있기는 하지만 걸음이 불편할 정도는 아니다. 선일재까지는 위험하지 않은 길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나의 기억에 채워져 있던 족쇄를 풀어낸다. 고삐가 풀린 기억들, 상념들, 후회들, 번민들이 무작위적으로 내 머릿속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상념은 과거에 머물다가 갑자기 미래로 넘어가 있고, 어느샌가 지금을 향해 있다.

선일재에서 임꺽정봉으로 가는 길은 본격적으로 경사가 가파르다. 헐벗은 겨울 나무 뒤로 제법 너른 땅이 펼쳐진다. 제대로 오르고 있다는 뜻이다. 등산은 내게 있어서 디스크 조각모음 같은 행위이다. 아무 생각 없이 걸음을 떼다보면, 불현듯 이런 저런 생각들이 치밀어 오른다. 대개 도시에서는, 내 방에서는, 사무실에서는, 생각들이 일정한 흐름을 갖춰서 일어나는데, 등산할 때는 정말 두서가 없다. 그렇게 상념의 소용돌이를 한 차례 겪고 나면 오히려 편안해진다. 이것은 내적인 카타르시스가 아닐까?

시야가 그리 맑은 날은 아니다. 방위를 찾아보니 저 넘어는 동두천 정도 되어보인다. 산에 오르면 모든 것들이 다 작아보여서, 현실의 고민의 무게도 작게 느껴진다.

저 넘어 보이는 것이 임꺽정봉이다. 해빙기까지 암벽은 통제된다. 하산할 때 알았는데, 임꺽정봉 뒤편으로 봉우리에 오를 수 있는 데크가 마련되어 있다.

정상에 거의 다 올라서 한 컷 얼굴 사진을 찍어보았다. 볕이 좋아 패딩이 조금은 거추장스러울 정도였다.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은 꽤 넓은데, 눈이 쌓여서 채 녹지 않아 있는 것이 마치 스키장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지나가는 행인에게 부탁하여 찍은 기념 사진. 나는 정말 십수 장을 공들여 찍어줬는데, 구도가 마음에 안 들지만 뭐 어쩔 수 없다.

그냥 내가 찍은 셀카가 훨씬 나은 것 같다.

마니산 정상에는 고양이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감악산 정상에는 개 한 마리가 수호신마냥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제법 표정이 늠름하다.

저 멀리가 동두천이고, 산 바로 아래 얼어붙어 있는 곳이 신암저수지이다. 저기서부터 감악산 정상까지 오른 것이다. 천천히 걷는다고 걸었는데 꽤 많이 걸어왔다.

저 굽이치는 강이 임진강이다. 임진강 넘어는 북한이다. 날이 흐려서 북녘이 뚜렷이 보이지는 않는다. 맑은 날 망원경을 들고 감악산을 오르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등산객이 많지는 않았다. 다 합하여 총 10명 정도 될까?

하산하는 길에 임꺽정봉도 잠시 들렸다. 감악산 정상이 해발 675m인데, 임꺽정봉은 해발 676.3m이니, 실상은 임꺽정봉이 더 높다.

무사히 하산을 마치고 저수지로 걸어가는 길에 또 한 마리를 마주쳤다. 제법 덩치가 좋아서, 멀리서는 귀여워 보였지만 내 옆을 지나갈 때는 혹여나 늑대로 돌변하지나 않을까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다.

새해 첫날 등산. 올 한해는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많은 산들을 올라보고 싶다. 산에서 상념을 허하고, 치유를 원한다. 그렇게 올 한해 더 단단한 내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