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후배의 죽음

무소의뿔 2022. 11. 3.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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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대학 후배가 죽었다. 코로나에 한번 걸렸었는데, 그 후유증으로 '가족성 적혈구잠식성 림프조직구증'이라는 외우기도 힘든 어려운 이름의 합병증에 걸려서 장기 조직이 괴사했다고 한다. 열이 많이 오르는데도 단순한 몸살 감기인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차근차근 병은 진행이 되어 결국 의식을 잃는 지경에 이르렀고, 수술한지 한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건강한 친구였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좋았다. 그런 친구가 이렇게 말도 안 되게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착한 친구였다. 싫은 소리를 하는 걸 한번도 들은 기억이 없다. 선배들의 짓궃은 장난과 농담에도 허허 웃고 마는 약간은 선비 같은 녀석이었다.

성실한 친구였다. 제대 후 공부를 열심히 해서 회계사가 되었고, 법인에서 야근에 밤샘에 고생 꽤나 많이 했을 것이다. 우직하게 소처럼 일하는 놈이라 거절도 못하고 자기 살 깎아먹으면서 일을 했다곤 한다.

나랑도 친분이 있지만, 엄청 많이 친하다고 할 수는 없겠다. 제대 후 몇 년간 캠퍼스에서 같이 무리지어 밥을 먹거나 담배를 태우거나 노가리를 깐 적은 많지만, 둘이 따로 보거나 속 얘기를 터놓을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다. 졸업하고 삶이 바빠서 얼굴을 자주 보지도 못 했다. 2019년 말인지 2020년 초인지 한번 서울대입구에서 여럿이 모여서 놀았던 게 마지막이니 얼굴을 마주한게 거의 3년이 다 되어간다.

교분의 깊이를 따진다면 조의만 표하고 돌아오는 것을 택해도 무례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이 친구의 마지막 가는 길은 왠지 모르게 꼭 직접 배웅을 해주고 싶었다. 너무 젊은 나이에 아직 채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로 생을 마감한 청춘이 너무 억울하고 불쌍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직접 아는 나의 동년배의 첫 죽음이어서일지도 모르겠다. 한 세대 윗분들의 장례식은 제법 다녔지만, 내 또래가 유명을 달리한 것은 정말 처음이란 말이다.

빈소에서 밤을 새고 버스로 다 같이 화장터로 이동했다. 관에 누워있었을 그 친구는 1시간 만에 뼈만 남았다. 그리고 다시 1분만에 가루가 되었다. 컨베이어벨트를 연상케 하는 화장장 내부 시설과 뼈를 분쇄하는 기계, 그리고 예를 다하긴 하지만 공정을 처리하는 듯한 직원의 손놀림은 종합적으로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자아냈다. 참 허망하구나, 삶이라는 것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숨이 붙어있던 육체다. 들숨과 날숨으로 호흡하던 역사가 참으로 손쉽고 허망하게 끝이 났다.

관이 화로로 들어갈 때는 나도 눈물이 나왔다. 잘 울지 않는 나인데, 그때만큼은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순수한 눈물이었다. 어떠한 이해관계의 개입도 없이, 그저 한 넋의 저물어감 그 자체를 순수하게 애도했던 것이다.

화장을 마치고 유골함을 들고 분당의 납골당으로 향했다. 거기서 마지막으로 유골함을 안치하는 의례를 지냈다. 망인의 유골함에 손을 대고 마지막 한 마디씩 건네는 시간이 있었다. 나도 말을 건넸다. 유골함은 따듯했다. 그리고 후배 녀석은 그렇게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날씨가 너무 화창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공활한 가을 하늘이었다. 후배의 아버지께서 점심을 사주시고 거마비를 따로 챙겨주셨다. 점심으로 먹은 갈비탕이 참 맛있었다. 후배는 갔는데, 산 사람은 또 허기를 느낀다. 버스에서는 밤샘의 여파로 정신없이 졸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생의 덧없음과 허망함, 그리고 생의 일상성이 갖는 필연적 천박함을 곱씹어본다.

사후세계는 없지만, 우리는 항상 사라진 존재의 연속성을 희망한다. 후배의 안녕을 빌어주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하등의 의미가 없지만, 그곳에서는 안녕하길 빌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다. 안녕하길 바란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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