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부루마블의 추억

무소의뿔 2022. 8. 24.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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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자전거길 라이딩한다고 대전을 지나니, 불현듯 어린 시절 사촌들과의 추억이 떠올랐다. 방학이면 가족과 함께 외가가 있는 대전으로 내려가곤 했다. 대전에서도 시골에 속하는 동네였는데, 지금은 대전광역시 서구 흑석동이라는 행정구역으로 되어 있지만, 어렸을 때는 종종 '흑석리'로 부르곤 했다.

이모와 엄마는 4살 터울인가 하는데 사촌들과는 태어난 시기가 고만고만해서, 어렸을 때부터 잘 어울렸다. 비록 사는 곳이 대전과 서울이라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방학 기간 동안에 한 일주일씩 외할머니댁에 모여서 신나게 놀곤 했다. 나는 빠른년생이라 한 해 먼저 태어난 아이들과 같은 학년에 속하였는데, 그래서 학년은 같고 나이는 한 살 위인 사촌누나가 있었고,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사촌동생이 있었다. 거기에 다섯 살 정도 터울이 있는 막내 사촌동생도 있었다.

엄마가 맏이이고 이모가 둘째, 그리고 셋째와 넷째는 삼촌들이었다. 삼촌들은 복자 돌림을 써서 이름을 발음할 때마다 구수한 느낌이 난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큰외삼촌을 수복이 삼촌, 작은외삼촌을 상복이 삼촌이라고 부르곤 했다. 수복이 삼촌에게는 다시 셋의 자식이 있고, 상복이 삼촌에게는 하나의 자식이 있다. 모두 매한가지 사촌이지만, 여기서부터는 터울이 좀 져서 같이 놀기엔 시기가 조금 달랐다.

외갓집에 모이면 어른들은 밤늦게까지 술과 안주를 먹고 마시며 담소를 나눴고, 우리는 건넌방에 모여서 놀았다. 낮에는 개울에서 놀고, 밤에는 외할머니가 준비해 준 간식을 먹으며 부루마블을 하고 놀았다. 부루마블은 우리에게 최고의 게임이었다. 밤마다 부루마블을 했고, 새벽을 넘겨서 잠들기 일쑤였다. 남자인 나와 사촌동생이 한 패를 먹고, 여자인 사촌누나와 내 동생이 한 패를 먹고, 막내 사촌동생은 깍두기로 은행장을 맡았다.

어릴 적이라 설명서를 꼼꼼히 읽지 않고 자기 좋을대로 해석한다. 한 행성에 지을 수 있는 호텔의 개수는 원래 제한이 있었지만, 우리는 임의로 그 제한을 해제했다. 돈만 들이면 무한대로 호텔을 쌓을 수 있게 했고, 한 번 주사위를 잘못 놀려 그 행성에 들어서면 즉시 파산할 정도의 요금을 물게 했다.

주로 간사한 꾀는 남자 팀에서 냈는데, 우리가 도입한 한 가지 추가적인 제도는 '대출'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돈이 없으면 가지고 있는 호텔 등 건물이나 행성을 처분해서 돈을 마련해야 하는데, 기껏 지어놓은 호텔을 허는 게 너무 아까워서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나중에 돈이 생기면 갚도록 했다. 이자를 따로 계산하지 않았으므로 그야말로 영구채요, 대동강 물 떠서 파는 격이었다.

부루마블 1은 전세계의 주요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부루마블 2는 우주의 주요 별자리를 배경으로 했다. 우리는 주로 부루마블 2를 했는데, 그 중에서도 요율이 제일 높은 별은 다름 아닌 '처녀좌'였다. 우리 팀의 전략은 단순했다. 최대한 많은 땅을 수집하고(대출 제도를 마련했으니, 자산으로 한번 선점하면 소유권은 사실상 영원했다), 처녀좌와 같이 주요 핵심 별에 호텔을 최대한 많이 짓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게임이 있다면, 은행장과의 횡령 공모도 서슴치 않았다. 사촌누나와 동생이 한눈 팔고 있는 사이에 막내 동생을 살살 꼬드겨 몇백만 불을 몰래 넘겨 받곤 했다. 한 건 한 건의 횡령이 성공할 때마다 소소한 웃음이 우리 사이에 이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지만, 애써 태연하려 했다.

그러다가 여자 팀에서 주사위를 잘못 놀려 결국 호텔을 수십 개 지어 놓은 처녀좌에 발을 디디면, 우리는 배를 잡고 자지러지는 것이다. 정말 웃다가 눈물이 날 정도로 웃곤 했다. 사촌누나와 동생의 허탈하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보는 것이 가장 재밌었다.

한바탕 눈물을 쏙 뺄 만큼 실컷 웃고 잠에 들고, 낮이 되면 다시 일어나 개울에서 놀고, 저녁이 되면 다시 또 부루마블을 하고 놀고, 대전의 기억은 즐겁게 논 기억뿐이다. 돌이켜 생각해봐도, 다시 그렇게 웃을 일이 있을 성 싶다. 그때는 정말이지 모든 것이 순수했고, 모든 것이 새로웠으며, 공허와 충만 사이를 헤집고 다닐 필요가 없는 참 좋은 어린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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