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벌초를 다녀와서

무소의뿔 2022. 8. 24.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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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에는 벌초를 다녀왔다. 충남 대천은 내 고향은 아니지만, 아버지의 고향이다. 공식적인 시의 이름이 대천인지 보령인지 노상 헷갈렸는데, 지금 다시 찾아보니 보령이구나. 아무튼 아버지가 나고 자란 곳이고, 그곳에 선친들의 묘가 모여있다.

선친이라고 해야 아버지한테나 각별한 의미가 있지, 사실 내게는 퇴색된 의미만이 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한 돌인가 두 돌이 안 되어 돌아가셨다고 하니, 나는 당연히 기억이 없다. 아버지는 4형제의 막내인데, 위로 큰아버지 세 분 중 두 분이 이미 영면하셨다. 그 묘가 함께 있긴 하나, 큰아버지들은 내가 어린 시절에 이미 환갑을 넘겨버렸고 별다른 교우나 추억이 없어 멀게만 느껴진다.

근친이 이러하니 그 위로는 더 멀게만 느껴진다.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를 넘어 그 위에까지 묘가 있다. 원래 대전 부근에 뭍혀 있던 묘를 한 10여 년 전에 이장하여 한 곳으로 모았다. 그 전에는 할아버지의 묘와 증조할아버지의 묘, 고조할아버지의 묘가 각기 다른 산에 묻혀 있어, 모두 같은 보령시에 있다고 하더라도 제사를 지내러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그 자체가 큰 고초였다. 그때는 아직 내가 어릴 때여서 벌초에 동원될 나이는 아니었지만서도 말이다.

유일하게 내가 친하게 여기면서도 기억이 있는 분이라고는 할머니이다. 할머니의 묘가 아니라면 나로서는 도무지 이 지루하고 힘든 벌초를 할 이유가 없다. 그것도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할머니와의 추억마저도 퇴색되어 간다. 제사를 드리러 올 때마다 추억과 상념에 젖어드는 것도 해를 거듭할수록 얕아진다. 이제는 추모의 마음은 거의 흔적이 없고, 무의미한 갈퀴질과 큰 절만이 반복된다.

의례라는 것이 참 그렇다. 어떤 종교적인, 영적인, 신앙적인 강한 의지가 아니라면, 의례는 곧바로 공허한 일련의 행위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벌초를 할 때의 내 꼴이 딱 그랬다. 한낱의 땡볕 아래 열심히 갈퀴질을 하지만, 내 머릿속은 오로지 한 번의 갈퀴질로 얼마나 많은 풀들을 쓸어낼 수 있을지 그 노동의 효율성에만 집중하고 있다.

비단 나만이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는 자정에 기해 제를 올렸다. 명색히 뿌리 깊은 양반 가문이라고 (그게 무에 소용이 있겠느냐만 말이다) 예법을 최대한 지켜 제사를 지냈다. 그러던 것이 내가 조금 더 크니 아침 일찍 제사를 올리고 바로 성묘를 가는 식으로 바뀌다가, 이제는 제사를 성묘에 겸해 묘 앞에서 한꺼번에 해치우는 식으로 되었다.

제사를 지내는 방식뿐만이 아니라 횟수에도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추석과 설날은 물론이오 주요 조상님 기일마다 제사를 지내던 것이 점차 간소화되어 이제는 연에 3번만 모인다. 여러 조상님들을 통합하여 4월 즈음에 한 번, 할머니 기일인 6월 즈음에 한 번, 차례를 대신하여 벌초 때 한 번, 이렇게 3번 제를 올린다. 그 3번조차도 귀찮고 힘든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오전 중으로 제사를 지내려면 서울에서는 7시에 출발해야 한다. 그러면 아무리 준비를 서두른다고 하더라도 6시 반에는 일어나야 한다. 그나마 엄마와 아빠는 훨씬 더 일찍 일어난다. 한 가지 더 곤혹스러운 것은 제사는 꼭 황금 같은 주말에 한다는 것이다. 주말을 맞이하여 술이라도 한 잔 하고 들어오면 다음날 느지막히까지 잘 수 있다는 게 주말의 큰 즐거움인데, 술도 채 다 깨지 않은 몸을 억지로 일으켜 차에 태워야 하는 것이다.

사촌형들이 있기는 하지만, 나와는 터울이 최소 10년이 난다. 이미 자식까지 본 형들이라 만나면 반갑긴 해도, 딱히 공유할 관심사가 없다. 이래저래 시골에 가면 딱히 즐거울 일이 없는 것이다.

그래도 별 수가 없다. 내세울 것은 없지만 그것이 종원으로서의 의무이다. 귀중한 주말 하루를 통으로 할애하는 것, 어찌 보면 그것이 제례에 바치는 내 희생제물이다. 그래봤자 1년에 3일인데, 참 그걸 아까워하게 되는 간사한 마음이 안타까워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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