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저녁 피크타임 프로모션이라고 열심히 배달을 수행하고 있는데, 관제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신정동의 한 쌀국수 가게 배달 건을 수행하였는데, 고객이 해당 음식을 받지 못하였다고 컴플레인하였고 재조리 및 재배달 요청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목동 14단지가 전달지였는데, 나는 분명 적혀있는 주소로 정확히 배달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음식을 받지 못하였다니? 관제센터는 내게 전달지로 가서 음식이 남아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지금 수행 중인 배달 건만 완료하고 해당 주소지로 찾아가겠노라고 말하고, 부리나케 그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음식이 없었다. 자, 그러면 이제 경우의 수는 몇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내가 주소지를 혼동하여 잘못된 곳으로 배달하였다. 둘째, 고객이 음식을 수령하고도 수령하지 못하였다고 거짓말을 했다. 셋째, 누군가가 그 음식을 가져갔다.
관제센터와 다시 연락을 했다. 배달처에 음식이 없다고 말하였고, 관제센터는 재조리 및 재배달에 따른 비용을 내가 수행한 다른 배달 건에 대한 대금에서 공제하는 것에 수긍하겠냐고 물었다. 처음에 '수금'이라고 잘못 들어서, 나한테 가게로 가서 해당 금원을 수금하라는 것인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재차 물으니 '수긍'이로 들렸다.
나는 찰나의 순간에 빠르게 생각했다. 나와 우아한형제들(주)(배달의민족 운영사이다) 간의 계약의 법적 성격은 무엇이었지? 화물의 운송에 해당할테니 운송계약, 넓게 보면 일의 완성을 목적으로 하는 계약이니 도급계약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면 고객이 음식물을 받지 못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곧 채무불이행을 주장하는 것인데, 나와 우아한형제들(주) 간에 체결한 계약(약관)에 채무불이행에 관한 특별한 조항은 없을까?
(참고로 현재 이 포스팅을 쓰면서 배송대행약관을 찾으려 하는데, 웹에서도 앱에서도 검색이 잘 되지 않는다. 우아한형제들(주)는 약관의 공시의무의 실질적 이행을 위해 약관을 쉽게 온라인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잘 게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의 꼬리를 물고 채무불이행의 입증책임에 이르렀다. 손해를 주장하는 자가 그 손해를 증명해야 하는 게 기본이다. 이때 입증책임의 전환을 정하는 계약 조항이 위법 무효한지 여부에 관하여 판례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 판례의 법리는 무엇이었는지까지는 기억이 안 났다.
그럴 때는 일단 '수긍하지 않는다'는 취지를 명시하는 것이 상책이다. 나중에 번의하더라도, 권리를 스스로 먼저 포기할 이유는 전혀 없다.
다행히 지금 맑은 정신으로 관련 법령과 판례를 리서치해보니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의 내용이 본건에 적용 가능하다.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 제7조(면책조항의 금지) 계약 당사자의 책임에 관하여 정하고 있는 약관의 내용 중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내용을 정하고 있는 조항은 무효로 한다. 2. 상당한 이유 없이 사업자의 손해배상 범위를 제한하거나 사업자가 부담하여야 할 위험을 고객에게 떠넘기는 조항 |
명시적인 판례는 (뇌가 굳어서) 찾기 힘들지만, 약관규제법 제7조 제2호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증명책임을 고객에게 부담시키는 약관 조항은 무효로 판단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판례 중에는 매매약관에서 입증책임 전환을 정한 약관 조항을 무효로 판시한 것이 있기도 하나, 본건은 도급이라 원용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듯 하지만, 참고 정도는 할 만 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우아한형제들(주)이 나의 채무불이행, 즉 내가 제대로 일의 완성을 해내지 못했음을 증명해야 손해배상청구권이 인정되는 것인데, 이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즉, 서두에 말한 3가지 경우의 수 중에 첫 번째에 해당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사실 이것은 증명하기 굉장히 어려운 문제이다.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 권리는 당연히 인정받지 못한다.
이런 요소들을 염두에 두고 '수긍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의외로 쉽게 일은 풀렸다. 관제센터에서 '예외처리하였으니, 특별한 정산이나 공제 없이 종결시켰다'는 것이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내 억울함은 풀리지 않았다. 나는 정말 진짜로 제대로 진실로 배달을 제 위치에 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 속상하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어플에 '여기에 두었어요 알리기' 기능(고객 현관 앞에 음식을 놓고 배달이 완료되었음을 증빙하는 사진을 찍어 고객과 관제센터로 전송하는 것)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배달을 수행하면서 불미스러운 사태가 없었고, 특히 고층 아파트에 음식을 놓고 여기에 두었어요 알리기를 하려면 인터넷이 잘 안 터져서 엘리베이터를 놓치기 일쑤여서, 아무 사진이나 대충 찍고 엘리베이터를 바로 타거나, 혹은 1층에 내려와서 아무 사진이나 찍곤 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여기에 두었어요 알리기'를 더 철저하게 수행하게 되었다. 행운처럼 이번 분쟁은 피해갔지만, 앞으로 다시 어떤 분쟁에 휘말릴지 모른다. 자신을 지키는 증거는 항시 철저히 모으는 습관을 기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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