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대구법원 재판 참석 일정 때문에 급하게 대구를 방문해야 했다. 기일 이틀 전에 출석하라고 하는 파트너 변호사가 참 황당하면서도, 뭐 어쩌겠는가. 힘 없는 어쏘가 까라면 까야지 말이다. 그래도 이왕 멀리 가는 건데, 재판만 하고 오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아서 오랜만에 100대 명산 챌린지를 이어가기로 마음 먹었다. 이번 목표는 TK의 명산, 대구 팔공산이다.
원래 계획은 차로 대구로 이동 후 대구에서 1박을 하며 팔공산과 금오산을 모두 오를 계획이었다. 팔공산은 하늘정원 최단코스로 해서 오르면 비로봉까지 별로 힘이 많이 들지 않는 코스이다. 하지만, 서울에서 4시을 달려서 대구까지 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것은 너무 번거롭고 힘들고, 무엇보다 업무시간을 많이 뺐긴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것보다는 SRT로 다녀오되, 당일치기로 후딱 다녀오는 것이 업무시간 loss도 줄이고, 동선을 최적화하며 시간과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는 선택지라고 판단되었다. SRT는 처음 타 보았는데, 동탄에서 동대구까지는 1시간 반밖에 안 걸렸다.
9시 23분 SRT 열차를 동탄에서 탑승하여 10시 55분 동대구역에 도착했다. 11시 10분부터 4시간 사용을 예약해 둔 동대구역 근처의 쏘카를 렌트하러 이동했다. 사실 자차 운전한지가 너무 오래되어 쏘카라는 렌트카 플랫폼이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었는데, 친구가 귀띔해준 덕분에 SRT냐 자차냐의 고민이 일거에 해결되었다. 동대구역에서 50분을 달리면 팔공산 하늘정원에 도착한다.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마이클 타이슨이 말했다.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쳐맞기 전까지는" 그랬다. 팔공산 비로봉은 해발 1,100m가 넘어가는 높은 봉우리인데, 3월 초 날씨에 눈이 녹아 있을리가 없었던 것이다. 제1주차장에 도착했을 때가 이미 12시가 넘은 때였고, 동대구역에서 멀지 않는 대구지방법원 재판은 15시 40분. 엄청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하늘정원에서 비로봉은 정말 가까운데, 제1주차장에서 하늘정원까지 가려면 2km 거리이다. 왕복으로 치면 4km이다. 쏘카 반납 시간은 15:10인데, 아무리 반납 시간을 연장하더라도(즉, 쏘카를 타고 법원까지 직접 간다고 치더라도), 15:30까지는 법원에 도착하여야 한다. 그러면 아무리 늦어도 정비 시간을 고려할 때 14:30에는 여기서 출발을 해야 한다. 등정을 고민하던 시각은 12:05. 60분에 20분을 더하면 편도에 80분, 왕복에 160분. 시간이 빠듯한 것 같기도 하면서, 보통의 등산객보다 조금 더 힘을 내본다면 어찌저찌 14:25까지 돌아올 수 있을 듯 했다. 관리소의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2시간 20분만에 다녀온 분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도 못할 것은 없다! 가 보는 것이다!!
등산로의 초입에서 마주한 계곡. 이 계곡은 하산 때 목마름을 해소해 주는 귀중한 식수원이 되었다..!! 채 녹지 않은 눈이 벌써 듬성듬성 보이는 것이 불길함이 엄습한다. 초입의 평지 구간은 거의 뛰다시피해서 산행을 시작했다.
왜 표지판은 항상 거짓말을 하는 느낌일까!! 1km는 온 것 같은데, 이정표 상으로는 500m 밖에 안 된다. 이건 단지 느낌만이 아닌 것이, 애플워치로 하이킹을 기록하는데, 확실히 실제 걷는 거리보다 이정표는 항상 더 야박하다.
그래도 제1주차장 입구에서부터 1.2km 구간까지는 갈만 했다. 경사가 완만한 편이기 때문. 진정한 지옥은 오도암 앞에서부터 펼쳐진다.
관리소 아저씨 가라사대, 하늘정원 가기 전 계단이 꽤 힘들다고 하셨다. 계단이 힘들어봤자지 했는데, 정말 말이 안 되는 계단이다. 714개의 계단인데, 안 그래도 눈이 가득 쌓여 걷기도 힘든데, 한층 한층의 경사가 정말 말이 안 된다. 헬스장에서 하는 천국의 계단과는 비교가 안 되는 할쉬함이다. 지옥의 계단이라고 명명해도 될 듯하다.
계단만 한 700m 되는 느낌이다. 하늘정원까지 남은 거리가 240m라고 되어 있지만, 체감은 500m이다. 너무 힘이 들어서 난생 처음 보는 상고대 풍경에도 전혀 감흥이 없었다.
714 계단을 다 오르면, 드디어 하늘정원을 만날 수 있다. 에스컬레이터의 위대함과 소중함을 십분 깨닫는 경험이었다.
구름이 봉우리를 덮고 있는 상황이라 시야가 좋지 않다. 군위군은 최근 대구광역시로 편입되었는데, 삼국유사의 고장인 줄은 미처 몰랐다. 조형물이 꽤나 멋드러지지만, 하늘정원에 도착했을 때가 이미 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기념 사진만 한 장 급히 찍고, 이제는 겉옷을 잠시 벗어두고 반팔로 급속 행군을 이어나가 본다.
비로봉까지 1km를 더 가야 한다니!!!! 그래도 여기부터는 군부대 와 인접한 길이라 포장이 잘 되어 있어서 걷기에 나쁘지 않다. 경사도 그리 높지 않아서 수월하게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문득 드는 걱정이, 하늘정원까지 코스가 매우 험난했는데, 하늘정원에서 가장 높은 비로봉까지의 구간이 너무 포장이 잘 되어 있고, 마냥 오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지인 구간도 있고 내리막 구간도 있어서 이게 비로봉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 하산하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하산 구간이라면, 옷까지 하늘정원에 벗어두고 온 마당이라 시간상 비로봉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 다행히 부부 등산객 분들이 맞은 편에서 지나오셔서 비로봉으로 가는 길이 맞냐고 물었고, 맞다고 응답하셨다. 그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의사결정을 위한 자원이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빠른 결단이 필요하다.
다행히 그 길의 끝에서 비로봉이 나왔다. 다른 봉우리에 비해서 넓게 펼쳐져 있고 대구 MBC 송신소가 있어서 이게 비로봉이 정말 맞나 싶었지만, GPS 발도장으로 확인되는 영락없는 비로봉이었다. 1시간 15분만에 제1주차장에서 비로봉까지 등정에 성공하였다. 나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록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기념 사진은 꼭 찍어줘야 한다. 이제 숨을 고르고 나니, 비로봉의 설경과 상고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많은 등산객들이 추위와 얼음길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겨울 산행을 나서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상고대가 자아내는 설경은 정말이지 감탄을 금할 길이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이렇게 나의 두 번째 100대 명산 도전을 마무리하였다. 하지만, 재판 일정을 맞추기 위해 하산도 서둘러야 한다. 아무리 늦어도 2시 20분까지는 제1주차장으로 복귀해야 한다.
상고대는 계속 눈과 사진으로 담아도 부족함이 없다. 참 이국적인 설경이다. 지상에는 봄이 나리고 있는데, 비로봉은 아직 설국이다.
하산을 마치고 나니 정확히 2시 7분이었다. 12시 7분에 등정을 시작했으니, 딱 2시간만에 비로봉을 찍고 온 셈이다. 신난 나머지, 관리사무소 문을 두드리고 아저씨께 자랑을 늘어놓았다. 나는 늙었는데, 역시 젊음이 좋다며 칭찬해 주셨다. 다음 번에 비로봉에 오는 등산객 중에 누가 물어보거든, 2시간만에 다녀온 사람이 있었다고 꼭 말해달라고 농담처럼 말을 남겨두었다. 정장으로 환복을 마치고, 다시 차를 급히 몰아 대구 시내로 돌아왔다. 다행히 재판에 늦지도 않았고, 변론도 무사히 마쳤다. 재판 이후에는 대구에서 공부 중인 대학 후배 녀석을 만났다. 후배가 잘 아는 뭉티기 집에서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뭉티기와 오드레기를 주문했다. 뭉티기는 처음 먹어보는데, 육사시미보다 훨씬 쫄깃하고 고소한 식감이 훌륭했다. 경상북도의 소주 '참'과 함께, 그리고 후배와의 즐거운 시간과 함께, 이렇게 나의 2번째 100대 명산 도전이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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