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 적응 때문인지 1시 반에 잠이 들었는데도 6시에 눈이 떠졌다. 예약한 숙소에서 6시부터 조식을 제공한다길래 일어난 김에 씻고 일찍 아침을 먹었다. 아이패드를 챙겨오길 잘 했다. 식사를 하면서 오늘 돌아볼 것들을 간단히 체크하고 아침 일찍 숙소를 출발했다.
오늘 오전에 돌아볼 곳은 리마의 구 시가지인 ‘센트로’ 지역이다. 우버 앱을 미리 설치하고 왔어야 하는데 Sim 카드를 바꿔 끼고 나니 한국 핸드폰 번호로 인증문자를 받을 수가 없었다. 호텔에서 택시를 불러서 싯가로 타고 갔는데 20 달러가 증발해 버렸다!!!
가장 먼저 ‘산 마르틴 광장’으로 향했다. 가이드북에서 이 곳 근처 환전소의 환율이 훌륭하다고 해서 일부러 이 곳으로 왔다. 1달러를 3.76솔로 바꿔준다. 1달러가 1,3000원이라고 치면 1솔에 약 350원 꼴이 된다. 이렇게 비교하고 보니 확실히 리마 물가가 한국보다는 저렴하다.

남미 독립의 아버지인 ‘산 마르틴’을 기념하기 위한 광장이다. 남미 국가의 독립은 19세기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문화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남미는 본디 원주민의 대륙이었을텐데, 남미 독립은 원주민의 승리라기보다는 식민지 유럽인의 승리는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생각했던 것보다 리마는 원주민 비율이 높은 듯하다. 아시아에서 넘어간 인류가 남미 원주민의 토대를 형성했다고 하는게 실감이 되었다. 중간중간 코카시안도 있긴 하지만 원주민이 훨씬 더 자주 보였다.

리마의 명동이라고 하는 우니온 거리를 지나가본다. 아직 9시 정도밖에 안 된 이른 시간이라 가게가 채 문을 열지 않고 인파도 한산한 편이다. 리마 구 시가지는 스페인과 아바나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듯한 인상이다. 스페인의 영향을 잔뜩 받은 듯한 건축물들 사이로 군데군데 낙후의 흔적들이 엿보일 때 아바나가 떠오른다.

우니온 거리에 스타벅스가 있었다. 정신도 차릴 겸 벤티 사이즈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11솔이니 한국보다 2천원 정도 저렴한 셈이다. 시원하게 목을 축이고 다시 여행을 시작해본다.

센트로의 중심지인 아르마스 광장이다. 경찰이 4면에 모두 배치가 되어 있는데, 대통령 관저가 바로 광장과 맞닿아 있어서 경계를 하는 듯하다. 두 광장을 모두 돌아보았지만 광장 자체로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보다는 리마의 습하고 더운 날씨가 더 기억에 남는다.

아르마스 광장의 동쪽에 접해 있는 리마 대성당에 들렀다. 입장료는 10솔이다. 불친절하게도 영어 설명 안내판이 없어서 그냥 인상 위주로 관람을 했다. 중남미에 처음 발을 들인 유럽인 피사로의 유골도 안치되어 있었다. 중세와 근세를 관통해 온 종교의 힘이 느껴진다. 성당 내부의 장식과 그림들은 유럽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묘하게 아메리카 토속의 느낌도 자아낸다. 정신의 뿌리는 스페인에 있지만 종교예술의 물적 토대는 아메리카에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가톨릭 예배보다는 잉카 문명스러운 느낌이 드는 황금 장식. 예컨대 이런 작품들이 그러하다. 과거의 유물들을 찬찬히 보고 있노라면 인류 문명의 분기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유되는 인류의 핵심적인 가치가 무엇인지에 관한 파편적이고 다양한 생각들이 든다.

리마 대성당을 나와 다시 광장의 북쪽 면을 보면 대통령 관저가 보인다. 철창 너머로 근위병들이 엿보인다. 시간대가 맞으면 근위병 교대식을 볼 수도 있다고 한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벗어나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산 프란시스코 성당이 있다. 성당을 가는 길을 좀 헤맸는데 그 과정에서 리마 구 시가지를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저 언덕 밑의 마을은 아마 빈민가일텐데, 알록달록한 색감의 집들이 이탈리아의 무라노 섬을 연상케 한다. 차도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지만 차량의 상태는 대부분 나빴다. 관리가 안 된 자동차라든지 버스가 뿜어내는 매연이랄지, 교통신호에 관한 사람들의 시민의식이나 운전자들의 운전 습관 이런 것들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져 저개발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듯했다.

리마 대성당은 물론 산 프란시스코 성당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현재는 성당 보수 작업으로 인해 접근성이 좋지 않다. 기다렸다가 가이드 투어를 함께 다녀오는 방법도 있었지만 가볍게 성당만 둘러보고 다시 아르마스 광장으로 향했다.

아직 현지 적응 중이라 배가 딱히 고프지는 않았지만 100솔짜리를 잔돈으로 만들기 위해 광장 근처의 아무 식당이나 들어갔다. ‘엘 친토’라고 꽤 장사가 잘 되는 일반 음식점이었다. 치차론을 베이스로 한 샌드위치와 음료 세트를 주문했다. 치차론은 삶은 돼지고기 요리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삶은 수육 같은 맛이 났다. 음료는 현지 과일을 베이스로 만들었는데 그럭저럭 먹어줄만 했다.

기본 샐러드로 내준 요리인데 생긴 것은 꼭 양파 같지만 양파는 아니었다. 그런데 너무 시어터진 소스에 버무려져 나와서 한 조각 맛을 보고 다시는 입에 대지 않았다. 페루 사람들은 신 음식을 참 잘 먹는 듯하다. 신 음식 때문에 저녁에 또 고생을 했다.

간단히 요기를 마치고 택시를 타고 센트로 지역을 벗어나 미라플로레스로 향했다. 숙소를 미라플로레스에 잡아두었으니 반나절 만에 다시 돌아오는 셈이다. 센트로에서 미라플로레스까지 옐로우 캡 기준으로 50솔을 요구했는데, 사설 택시보다 비싼 값이지만 안전을 생각해서 그냥 타기로 했다. 도착한 곳은 미라플로레스의 ‘사랑의 공원‘이다. 키스하는 연인상이 유명한 관광 명소이다.

바르셀로나의 구엘 공원을 연상케 하는 장식들이 인상적이다. 공원 자체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뷰가 너무 좋고 바다바람을 즐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는 공원이다.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 위에 세워진 도시 리마. 이 바다가 태평양이라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다. 태평양의 가장 서쪽에 사는 내가 태평양의 가장 동쪽 나라로 왔다. 우리는 동해에서 일출을 보고 서해에서 일몰을 보는데 남미 사람들은 대서양에서 일출을 보고 태평양에서 일몰을 보겠구나.

해안가를 따라 걸어내려가면 ‘라르코마르’라는 미라플로레스 지역의 복합 쇼핑몰을 마주하게 된다. 딱히 쇼핑할 게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구경할 겸 쇼핑몰을 경유해본다.

라르코마르를 지나 바랑코 쪽으로 계속 걷다보면 리마 현대 미술관이 나온다. 관의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꽤나 신선한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뭐 한국 예술도 잘 모르는데 페루 예술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느냐만,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과 뇌에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었다.

스페인어를 전혀 못하니 작품의 풍부한 역사적, 사회학적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모티프들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미술관 관람이 꽤나 의미가 있었다. 문외한인 나로서는 대충 뭉뚱그려 ‘아마존의 눈물’ 정도로 다가왔다.

미술관을 나와 조금만 더 걸으면 바랑코 지역에 도착한다. 스페인어로 ‘벼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약간 예전 합정, 상수에 젊은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 살며 작품 활동을 했듯이, 바랑코 지역에는 페루의 젊은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산다고 한다. 거리의 느낌은 뭐랄까 뉴욕으로 치면 브루클린을 연상케 한다. 약간 외곽 지역의 거친 느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날 것의 매력이 느껴지는 거리였다.

예술가의 거리답게 벽화가 유명하다. 바랑코 거리의 끝 쪽에 스타벅스가 있는데 그 뒤편으로 벽화거리가 펼쳐져 있다. 밤이 되면 치안 때문에 벽화거리를 방문하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고 하는데, 나는 낮이라 별 걱정 없이 거리를 쏘다녔다.

벽화 거리에 있는 ‘한숨의 다리’. 이 다리를 숨을 참고 건너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멍청한 이야기를 보고, 또 멍청하게 숨을 참고 다리를 건넜다. 리마의 낮은 꽤나 무더워서 그리 길지 않은 다리임에도 꽤나 애를 먹었다. 생각해보니 숨을 참긴 했는데 소원을 빌지를 않았다.

길이 절벽 아래로 이어져 있길래 겸사겸사 해안가로 내려왔다. 여기 모래는 검다. 멀리서 볼 때는 고즈넉하기만 했는데, 막상 해안으로 내려오니 불쾌한 플랑크톤 냄새가 코를 찌른다. 발이라도 담가볼까 싶었지만 꺼려져서 그냥 바다를 구경만 하다 왔다. 물은 참 동해가 깨끗하다.

바랑코 투어를 마칠 즈음부터 몸이 급격히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제 무거운 배낭을 메고 오래 돌아다녀서 몸이 피로한가 했는데, 몸살인 듯 했다. 더위에 비해 땀도 과도하게 흐르는 게 식은땀처럼 느껴져서, 원래는 바랑코에서 미라플로레스 숙소까지 걸어서 돌아올 예정이었지만 그랬다가는 정말 힘들어질 것 같아서 택시를 탔다. 사설 택시를 타니까 15솔 정도에 이동할 수 있었다. 숙소에서 샤워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회복하고, 아직 아픈 몸이지만 태평양에서의 일몰을 보기 위해 다시 라르코마르 쪽으로 향했다. 좋은 카메라를 챙겨왔더라면 저 산 로렌조 섬 너머로 걸리는 태양을 더 예쁘게 담을 수 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이 든다. 섬 끝자락에 걸리는 태양은 정말 장관이었다. 고즈넉한 리마의 하루를 이렇게 일몰과 함께 마무리한다.

가이드북에서 추천한 해산물 레스토랑인 ‘푼토 아술’이 마침 숙소 바로 옆에 있길래 여기서 저녁을 먹었다. 체인으로 리마에 여러 지점이 있다.

칠레에서 특히 인기가 좋다는 칵테일인 ‘피스코 사워’를 주문해 보았다. 칵테일조차 신 걸 마시다니 페루 녀석들…

세비체라는 해산물 요리이다. 훈연한 생선과 옥수수 그리고 고구마를 시어터진 소스에 절여서 내온다. 페루에 오면 꼭 먹어보라고 가이드북에서 하도 강조를 해서 먹었는데, 입맛에 썩 맞지는 않았다. 생선 자체는 신선했는데 소스가 너무 시다. 왠만하면 음식을 안 남기는데, 더 먹다가는 내일 속에서 탈이 날 것 같아서 먹다가 중도 포기를 했다. 여기 옥수수는 알이 참 굵어서 신기했다. 한국 옥수수의 두 배는 되는 듯 하다.

메인 요리로는 ‘로모 살타도’를 주문했다. 찹스테이크 비슷한 요리라고 생각하면 된다. 굽기를 미디움과 웰던 중에 고르라고 해서 미디움으로 했더니, 우리나라 기준으로 웰던이 나와버렸다. 음, 웰던을 시켰더라면 어떤 굽기로 내왔을지 궁금해진다. 로모 살타도는 세비체에 비하면 훨씬 먹을만 했다. 밥도 한 공기 같이 줬는데, 베트남쌀 같이 푸석푸석하고 흩날려서 몇 술 뜨다 말았다.
남미 여행의 첫 날이었던 리마 시내 관광을 이렇게 마쳤다. 저녁에는 몸 상태가 더욱 악화되어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는데, 그래도 총량으로는 꽤 오래 잔 듯하다. 밤에 자는 동안 가위도 눌렸는데 천만다행인지 귀신이 나오지 않는 가위눌림이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새벽에 잠에서 깰 때마다 담배를 피러 1층으로 내려왔는데, 데스크 보는 직원 분이 이상하게 봤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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