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연차를 내고 쉬었다. 참 잘 쉬었다. 어제 많이 마시기도 했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침에 알람을 맞춰두고 어떻게든 일어나 출근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저,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았을 뿐이다. 충분한 늦잠을 자고, 느지막히 일어나 엄마가 끓인 김치말이국수로 해장 겸 점심 식사를 요기한다. 다시 조금 누워서 쉬다가, 벼르고 벼러 왔던 타이어 공기압 충전과 세차를 하러 일어났다.
BMW 코오롱모터스 서비스 센터가 성산에 있었다. 차량을 체크인하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담배도 한 대 태워본다. DMC에 전셋집으로 신혼집을 꾸렸던 친구, DMC에서 치뤘던 첫 바디빌딩 대회가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먼 옛날의 일인 것 같지만, 불과 몇 년 전, 몇 달 전이다. 시간은 정말 빠르구나. 앞바퀴 공기압이 많이 빠져서 달릴 때마다 내심 마음이 불편했는데, 이번 점검으로 공기압을 가득 채워서 다행이다.
차를 몰고 당산으로 간다. 미리 전화해 둔 손세차 업체로 찾아갔다. 손세차에는 1시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차를 맡기고 근처 카페로 향한다. 아메리카노 한 잔과 빵을 주문한다. 커피를 마시며 스마트폰으로 모바일 게임을 했다. 내가 로스쿨 3학년인 때부터 했으니, 벌써 만으로 거의 5년이 다 되도록 하는 게임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찾아오고 떠나갔지만, 이 게임만은 그대로이다.
세차로 말끔해진 차를 보니 기분이 좋다. 4만원이라는 비용이 적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그만한 값어치는 있다고 느껴졌다. 기분 좋게 차를 몰고 집으로 향한다. 집에 돌아오니 엄마는 일정이 있어 집을 비워두었다. 나는 불을 다 끄고 침대에 누워서 다시 휴식을 취한다. 이리저리 어지럽게 유튜브 쇼츠 영상을 보다가 잠을 청할까 하다가, 저녁을 먹자는 엄마의 말에 수영 전에 간단히 요기하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고등어구이를 메인 디쉬로 한 저녁상을 함께 한다. 별 특별한 이야기 없이, 그렇다고 침묵에 침잠해 들어가는 것도 아닌 저녁 식사 시간이 이어진다.
연차를 낸 목요일이지만, 수영 강습은 포기할 수 없다. 시간에 맞춰 집을 출발한다. 날이 제법 따듯해서 걷는 기분이 좋다. 저번 화요일에는 처음으로 배영을 연습했다. 키판을 잡은 채로 발차기만 연습한 것이지만, 자유형 다음 단계를 최초로 접했었다는데 나름 큰 의의를 두었다. 아침반과 다르게 저녁반 강사님은 의욕적으로 진도를 나간다. 자유형 때 나는 두 번 팔을 저은 후 호흡을 했었는데, 네 번 팔을 젓고 호흡을 할 것을 주문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 오른다. 그러더니 나를 일반 성인 풀로 불렀다. 청소년 풀은 거리 12m이고 수심이 최대 1.2m이다. 여기서만 자유형을 연습했었는데, 이제는 거리 25m에 달하는 일반 성인 풀로 넘어간 것이다.
참 놀랍지. 아주 잊혀져 있던 기억들이 같은 동작을 수행하면서 불현듯 떠오른다. 나는 10살 때 수영을 배웠었다. 그때 배영을 하면서 누워서 바라보던 수영장 천장의 기억이 지금 배영을 다시 하면서 떠오른다. 긴 레인에서 자유형을 하다가 코 끝으로 물이 자꾸 새어들어와, 호흡이 거칠어질 때 시야가 흐려지던 기억이 지금 다시 레인을 헤엄치며 떠오른다. 기억을 넘어서 각인이라 할 만하다.
확실히 운동 강도가 올라가니 상념이 딱히 머물 틈이 없다. 반바퀴만 돌아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수영은 참 재미있는 운동이다. 앞으로도 꾸준히 계속 하고 싶다.
수영을 마치고 친구를 불러 홍대입구로 갔다. 사주를 믿지 않지만, 사주를 보고 싶었다. 원래는 내일 사주를 보려 했지만 내일 같이 가기로 한 친구가 일정이 안 된다고 하여, 급히 친구를 또 섭외했다. 돈을 지불하고,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듣는다. 그러니까 그 돈으로 일종의 위로를 사는 셈이다. 심리상담이 한 시간에 7만원이었으니, 훨씬 싸게 먹힌다. 사주를 다 보고 나와서 그 아주머니의 풀이가 얼마나 내 실제 인생에 잘 들어맞는지에 관한 별 쓸모 없는 장광설을 서로 늘어놓는다. 친구는 그만큼 내 인생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다. 사주는 홍대에서 봤지만 택시를 타고 신촌으로 이동했다. 친구는 다모토리를 가고 싶다고 했다. 2015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모토리를 방문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벌써 8년 전이구나. 나는 20대 중반이었고, 꿈 많은 청년이었지. 여러 기억들이 머릿 속을 교차한다. 맥주병이 쌓여 간다. 자아에 대한 관념이 없던 시절의 노래들이 스피커 밖으로 흘러나온다. 춤을 추는 사람들을 관망한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의 입을 바라본다. 술이 달아오른다. 그렇게 우리는 거의 10병의 맥주를 비웠다.
하나둘 자리를 뜨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가게의 자리를 마무리한다. 각자 택시를 잡고 마지막으로 연초를 한 대씩 나눠 폈다. 양화대교 너머로 네온 불빛이 일렁인다. Sting의 Shape of my heart를 들으며 차창을 응시한다. 문득 깨달았다. 술집에 수영 가방을 놓고 왔구나. 차를 돌릴까도 고민했지만, 아서라 그냥 내일 찾아야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도망치는 사람은 싫다. 날 이용하는 사람은 더욱 싫다. 나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는 것은 견딜 수가 없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내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다가, 금세 집에 도착했다. 자기 전에 취기를 빌려 시간을 조금 할애하여, 그것들을 기록해봤다. 이제는 정말 잠에 들 시간이다.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요일은 너무 피곤하다 (0) | 2023.02.15 |
---|---|
주말 동안의 기록 (0) | 2023.02.13 |
시간은 흐른다. (0) | 2023.02.09 |
술과 고기와 악몽과 자부심에 관하여 (0) | 2023.02.07 |
나를 추앙하기로 결심했다. (0) | 2023.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