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시간은 흐른다.

무소의뿔 2023. 2. 9. 12:09

카를로 로벨리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나의 시간은 흘러간다. 나의 시간은 나의 관점과 인식 속에서 나의 속도로 흘러간다. 때로는 쏜살과 같이, 때로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은 느린 걸음으로.

어제는 또 다시 회식이 있는 저녁이었다. 회식이 잦은 팀은 아니지만, 이번 주는 유독 같이 모여서 기념할 만한 일들이 많이 예정되어 있었다. 내 옆자리에서 일년 반을 함께 일해 온 변호사님의 퇴사 송별과 옆옆옆자리로 새로 합류하신지 한달이 된 변호사님의 입사 축하를 한꺼번에 하는 자리였다. 작년에도 한번 회식으로 방문한 적이 있었던 광화문의 오리고기 코스 요리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우리 부문장은 칠친주를 참 좋아한다. 별 맛은 없는데, 칠분 안에 친해지는 술이라고 해서 소주 2, 맥주 1, 사이다 1의 비율로 만든다. 원샷을 해야 소주의 쓴맛이 덜 느껴진다고 원샷을 강조한다. 칠친주를 원샷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팀에서 나랑 부문장밖에 없다. 팀장은 회식 중간에 육아 때문에 자리를 빠져나가야 해서, 칠친주를 마시기 곤혹스러워 했다. 보기가 안쓰러워 내가 흑기사를 자처하고 팀장의 몫까지 마셔버렸다.

2차를 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월요일 회식에서 2차를 안 가서 오늘까지 안 가기 마음이 좀 그랬다. 2차 자리에서 어른들의 별로 시덥지 않은 이야기들을 들으며, 시간을 허송한다. 적당한 추임새를 넣고, 적당한 질문들을 던지며, 적당한 스몰토크를 이어간다. 12시쯤 드디어 자리가 파하고, 지친 몸을 지하철에 싣는다. 12시의 지하철은 한산하다. 취기가 오른 눈으로 스마트폰의 화면을 이리저리 응시하다가, 지하철 노선도를 보다가, 스쳐지나가는 플랫폼을 멍하니 노려보다가,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옷을 대충 던져 놓고 이불 속으로 몸을 웅크리다 잠이 들었다.

오늘은 하루 연차를 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쉬고 싶었다. 9시 반까지 느지막히 잠을 청하고 일어나서 화장실을 몇 번 다녀오고, 침대에 누운 채로 귀멸의 칼날을 마저 보다가 점심으로 엄마가 끓여준 김치말이국수를 먹고, 커피 한 잔을 내려서 방에 앉아서 일기를 쓴다.

기다림의 시간은 느리고 더디다. 내일은 이직 지원했던 회사의 서류 발표일이다. 모집 연차보다 1년 경력이 더 많아서 서류를 통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면접 기회가 주어진다면 참 좋을 것 같은데, 과연 어떻게 흘러갈지? 마음이 싱숭생숭하니 내일은 등산을 다녀올까 싶다.

끝난 기다림도 있었다. 무례하다고 느꼈다. 사실 예전에도 무례했던 사람이었다. 여전히 무례하구나, 이 사람은 바뀐 것이 없구나. 그런 무례함을 견딜 이유도 힘도 없다. 잠시의 단꿈은 이내 씁슬한 뒷맛으로 변질되었다. 교차로에서 엇갈려버린 인연에 연연하지 말아야지 생각해 본다.

조금만 더 쉬다가 씻고 자동차를 정비하러 나들이를 다녀와야겠다. 타이어 공기압도 채우고, 처음으로 세차도 해보련다. 그러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쉬다가 저녁 수영을 다녀오련다. 그러고 다시 쉬면서 독서로 하루를 마무리할려고 한다. 별 일 없이 흘러가는 하루가 주는 소중한 휴식이다.

1. 지난 내 생일에 생각 이상으로 많은 선물을 받았다. 주변을 살뜰히 챙기는 성격이 전혀 아님에도, 나라는 존재를 기억해주고 축하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올 한해는 내가 주변을 챙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2. 어제 술을 꽤 많이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숙취가 없어서 감사하다. 몸이 조금 힘들긴 하지만, 숙취로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참 행복한 일이다.

3. 귀멸의 칼날 유곽편이 이미 나온 줄도 모르고, 넷플릭스만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다른 플랫폼을 통해 유곽편을 볼 수 있었다. 재미있는 컨텐츠를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다. 소년만화의 열정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귀멸의 칼날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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