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술과 고기와 악몽과 자부심에 관하여

무소의뿔 2023. 2. 7. 09:53
728x90

어제는 회식이 있었다. 김앤장 변호사 분들과의 자리였다. 김앤장 입장에서는 우리가 고객사이니 고객 관리 차원에서 가끔씩 이렇게 모임을 갖는다. 엄밀하게는 우리 회사가 고객사이지, 내가 고객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갈 이유가 사실 없다. 하지만 우리 부문장은 나를 약간 술 상무 개념으로 아는지, 외부 로펌과의 모임 자리에 자꾸 나를 데리고 가려고 한다.

친밀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술자리를 즐기지 않는다. 특히 같은 세대가 아닌 경우에는 더욱 별로다. 같은 세대라면 그래도 재미있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텐데, 세대가 다른 양반들과는 생애주기의 다른 지점에 서 있기 때문에 함께 공감하며 나눌 이야깃거리가 드물다. 그러니까 어제의 모임은 어르신들의 추억팔이에 헛웃음을 지으며 장단을 맞춰주는 그런 자리였다.

그 와중에 고기는 참 맛있다. 한와담이라고 우리 팀 회식으로도 몇 번 갔던 깔끔한 고깃집인데, 질 좋은 한우를 써서 확실히 고기 맛이 좋다. 어르신들 이야기를 들으며 쉬지 않고 젓가락을 놀려 고기를 탐한다. 술안주로 시킨 새우와 치즈 그리고 볶음밥까지 야무지게 잘 먹었다. 미식을 즐겨하는 편은 아니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다. 그러니까 미식으로 기분을 달래야 할 만큼 미식에 대한 탐닉이 크지는 않지만, 우연히 주어지는 미식의 기회는 일상을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2차를 가자는 어르신들의 제안을 정중히 사양하고, 지하철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친한 동생과 전화를 하며 일상의 고민들을 토로한다. 좋은 친구이다. 항상 밝고 긍정적이고, 현실적인 조언들을 제공한다. 그 조언에 따른 결과가 항상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후회는 덜 남기는 방향인 것은 맞다. 그 친구의 조언은 항상 일관된다. 내 마음이 편한 길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자기중심적이고 어떻게 보면 실존적이다. 내 마음이 가는대로 해보고 싶은 일이 생겼다. 아니, 통화 끝에 그렇게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잠에 든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심한 악몽을 꾸었다. 목이 잘린 귀신과 밀폐된 공간에 갇혀서 고통 받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방문을 열고 엄마와 아빠가 있는 공간까지 이동하는 게 몹시 힘들었다. 이 나이를 먹고도 생에 가장 두려운 순간에 의지할 곳은 부모님인가보다.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간신히 잠에서 깼다. 침대와 이불이 하나로 땀에 젖어있었다. 다행히 다시 잠든 후에는 별다른 악몽을 꾸지는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수면 기록 어플을 켜서 1시경 잠꼬대 녹음된 것을 재생시켜 보았다. 꿈 속에서는 절박한 절규가 현실에서는 갸날픈 탄식 정도이다. 괜히 헛웃음이 났다.

출근을 준비하며 문득 '자부심'에 관한 아이디어의 파편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자부심. '자기 자신 또는 자기와 관련되어 있는 것에 대하여 스스로 그 가치나 능력을 믿고 당당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한다. 어제 자존감이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에 대한 긍정'이라는 뜻임을 확인했다. 생각해보면, 나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은 있는 편이다. 하지만 자존감과는 결이 확실히 다른 듯하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긍정하지 못하지만, 내가 살아온 과정에 대해서는 꽤 높이 평가한다. 누구 못지 않게 치열하고 열심히 살아왔다. 생에 임하는 치열하고 절박한 자세, 어쩌면 그것이 내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방법 아닐까? 그러니까 지금의 안정적이고 고요한 삶 자체가 내 인생에 대한 불만족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삶은 상당히 피곤하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 나는 그런 식의 인생 모델, 즉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는 삶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때의 깨달음은 꽤나 절박했고, 지금도 유효할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밸런스일까? 그러니까 나 스스로를 어느 정도 독려하면서도 지속가능성이라는 큰 틀을 유지하는, 이른바 '적당히 열정적인 삶'을 산다면 자존감 회복에 조금은 보탬이 될런지?

얼핏 드는 생각으로는, 자부심이 과거에 대한 개념어라면 자존감은 현재에 대한 개념어라고 느껴진다. 그렇다면 사실 자부심을 연료로 해서 자존감을 채우는 작업이라는 것은 이론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을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서 과거의 경험을 동원하는 게 어색하게 느껴진다. 있는 그대로를 긍정한다는 것은 존재하는 그 양상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존재의 과거 양식이 존재의 현재 양식의 평가 기준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게 필요한 것은 다시 '추앙'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추앙으로는 부족하다. 나를 추앙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어떤 칼럼에서 말했다. 사랑은 교환이지만, 추앙은 그렇지 않다. 추앙은 맹목적이다. 조건부가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상호 추앙의 유일한 케이스는 나의 해방일지의 염미정과 구씨뿐이다. 염미정의 대사 중에 '나는 한 번도 채워져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나를 추앙하라'는 말이 있다. 나는 채워져 본 적이 있는가? 있다 한들 그 채움이 유지된 적이 있는가?

그래서 나는 추앙으로 나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1. 마음이 적적할 때 부담 없이 전화를 걸 수 있고, 또 그렇게 건 전화를 잘 받아주는 친구가 있음에 감사하다. 그 친구는 넘치는 긍정 에너지로 항상 날 기분 좋게 만들어준다. 대단한 능력이다.

2. 점심을 먹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 날이 많이 따듯해졌다. 아우터가 없어도 될 정도. 봄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날이 따듯하다는 것,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은 감사할 만한 일이다.

3. 오늘은 오랜만에 수영장으로 가는 날이다. 설 연휴다 뭐다 해서 몇 주 수영을 쉬었는데, 다시 물장구를 칠 생각을 하니 조금은 설레인다. 설레일 일이 있다는 것은 감사할 만한 일이다.

728x90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들이와 같은 하루  (0) 2023.02.10
시간은 흐른다.  (0) 2023.02.09
나를 추앙하기로 결심했다.  (0) 2023.02.06
2월의 첫 주를 보내며  (0) 2023.02.05
인생의 방향성에 관한 고민  (0) 2023.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