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환갑을 맞이했다. 30대가 되고 나니 30대의 젊었던 아빠가 떠오른다. 가족끼리 경주에 놀러갔을 때, 다른 관광객에게 사진을 부탁했는데 아빠와 나를 형과 동생 사이인 줄 알았다고 했다. 젊고 건강했고 동안이었던 아빠는 어느새 61살이 되었다. 시간의 빠르기가 정말 무섭다.
환갑인 만큼 조금 더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아빠가 좋아하는 골프와 관련된 선물을 해드릴까도 싶었지만, 내가 골프를 안 치니 전혀 감이 안 와서 어려웠다. 좋은 골프장을 예약해 드릴까 싶기도 하다가, 골프채를 선물할까 싶기도 했고, 뭐 이런저런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역시 그나마 내가 잘 아는 분야에서 선물을 해드리는 게 맞겠다 싶어서, 고심 끝에 비스포크 정장을 선물하기로 했다.
정장을 선택한 이유는 첫째, 아버지가 이제 은퇴까지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는데, 정말 제대로 된 좋은 수트를 한 벌 선물해 드리면 중요한 행사 때나 경조사 때 유용하게 입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둘째, 비스포크를 맞추는 그 과정 자체가 아버지에게 좋은 경험과 추억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평생을 검소하게 살아오셔서 돈을 쓸 줄을 모르시는 분이다. 체촌과 가봉의 과정을 거치면서 정말 온전히 나만을 위한 한 벌의 훌륭한 수트를 맞추는 경험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리고 셋째, 체촌과 가봉의 지리한 과정을 거치면서 아버지와 내가 함께 하는 시간을 늘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냥 딱 주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 경험과 시간에 내가 동참함으로써 강제로 아버지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 무뚝뚝한 아들이라는 것은 엄마뿐만 아니라 아빠한테도 마찬가지이다. 아버지와 시간을 더 갖는 게 의미가 있을 것이다.
비스포크를 선물하기로 하니, 이제 샵을 고르는 일이 남았다. 우선 아빠 학교가 강북이니 강남보다는 강북에 위치한 샵이 편했다. 나도 회사가 광화문에 있으니 서로 모이기 편하려면 답은 강북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양복을 맞췄다는 가게부터 뭐 이것저것 후보가 많았지만, 최종적으로 명동 장교빌딩에 위치한 '반니 비스포크'를 선택했다. 가격과 접근성 등을 모두 고려해서 결정했었는데, 결정의 시기와 아빠를 실제 샵으로 데려간 시기가 꽤 차이가 나서, 무엇이 '반니'를 선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풀 비스포크는 아니지만, 세미 비스포크는 몇 번 진행해 본 적이 있어서 그래도 나름 능숙하게(?) 잘 대처했다. 테일러 분과 상담을 하면서 우선 원단부터 골랐다. 튀는 걸 싫어하고 튀는 걸 입을 위치도 아니라서 우리 아빠는 네이비와 그레이 중에서만 고민했고, 최종적으로 그레이 톤을 골랐다. 약간의 스트라이프 패턴이 살짝 가미된, 헤링본 느낌이 살짝 가미된 패턴을 골랐고, 원단은 처음에는 이태리 원단 쪽으로 마음이 기울다가 영국 해리슨 원단을 보고 마음에 드셨는지, 최종적으로 해리슨 원단으로 결정했다.
해리슨 원단 기준으로 수트 한 벌에 150이라고 한다. 원래는 제냐 원단으로 진행하고 싶었다. 내가 아는 원단 중에 제일 고급 원단이 제냐라서, 아빠에게 가장 좋은 걸 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제냐 원단 중에는 아빠가 원하는 색상과 패턴이 없었다. 150만원도 비싼 가격이지만, 풀 비스포크 치고는 생각보다 가격이 괜찮아서 코트 한 벌도 같이 맞추자고 제안했지만, 아빠는 극구 거부했다. 아들이 거지인 것을 이미 알고 계신 것...ㅠㅠ
그래서 바지를 한 벌 더 맞추고, 와이셔츠를 한 벌 같이 맞추는 것으로 최종 타협을 봤다. 바지 한 벌을 더 추가할 경우 55만원이고, 와이셔츠를 맞추는 것은 9만원이었는데, 앞에서는 5만원, 뒤에서는 2만원을 DC해주셔서 최종 207만원으로 되었다. 참고로 나는 청바지 한 벌로 4분기를 나는 중이다. 괜찮다. 나는 수트보다 청바지가, 청바지보다 츄리닝이 좋다.
상담 대응을 하시는 분은 내 또래의 젊은 분이었지만, 실제 테일링을 하시는 분은 경력이 오래된 베테랑 느낌이 물씬 나는 분이라서 더 믿음이 갔다. 비스포크를 진행하면 수트의 디테일도 본인의 취향에 따라 고를 수 있는데, 역시 전형적인 아재 취향으로 골랐다 우리 아빠는. 투 버튼에 포켓은 덮개가 있는 것으로, 바지 주름은 하나, 바지 단추는 없는 것으로, 와이셔츠에도 포켓을 넣었다. 디테일을 잡고 체촌을 진행했다.
돌아오는 차에서도, 돌아온 후 집에서도 계속 비스포크를 얘기하는 것을 보니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다. 비스포크를 환갑 선물로 결정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금요일을 즐기러 집을 나섰다. 이번 비스포크 경험이 아빠 생에서 또 잊지 못할 좋은 추억으로 남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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