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옛 친구

무소의뿔 2022. 8. 16.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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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꽤나 많이 친했는데, 연락이 끊어진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고등학교 친구가 있다. 내 고등학교는 셔틀버스로 학생들을 실어날랐는데, 나와 같은 과이면서도 나와 같은 셔틀버스를 타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이었고, 말수가 많지도 않고 교우관계가 넓은 친구도 아니었다. 나는 활달하고 사교적인, 소위 말해서 나대는 성격이었는데, 마침 그 셔틀버스에 같은 과라고는 그 친구밖에 없어서 자주 옆자리에 앉았었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꽤 친한 사이가 되었다.

과의 다른 친구들은 나와 그 친구의 교분을 꽤나 의아해 했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둘이서 친구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친구와의 교우관계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까지 계속되었다. 사는 동네가 지근거리이다보니, 만나기도 편했고, 술 한잔 기울이기도 좋았다. 둘 다 나란히 입시를 조진 덕도 있었다. 그나마 1년 먼저 구제받은 내가 그 친구의 부탁으로 그 친구의 수학 과외를 봐준 적도 있었다. 결국 그 친구는 고생 끝에 한양대에 붙었다.

서울대 합격 발표 이틀 전인가 삼일 전인가, 엄마와 대판 싸우고 집에 있기가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싫어졌다. 가출 아닌 가출을 했는데, 간 곳이라고는 집에서 200m 떨어진 찜질방이었다. 하지만 평생을 침대에서 잤던 내가 등이 배기는 딱딱한 바닥에서 잠이 올리가 없었다. 밤새 뒤척이다가 아침이 되자마자 그 친구가 총무로 있던 독서실에 찾아갔다. 방학이긴 했지만 아침이라 학생들이 오지 않는 시간이었고, 빈 독서실에 요대기를 깔고 잠을 청했던 기억이 난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우리는 종종 연락을 하고 시간을 보냈다. 동네 친구라고 부를 만한 녀석은 그 친구 하나였다. 대학교 1학년 때 하도 잘 먹고 잘 마시고 다니다보니 살이 급격히 불었다. 다급한 마음에 여름방학 동안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한강에서 열심히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언제 한번은 해가 저물기 전에 출발해서 새벽 2시에 집에 돌아온 적도 있었다. 언젠가는 또 일산까지 자전거로 다녀온 적도 있었다.

우리는 안양천 정자에 누워서 담소를 자주 나눴다. 어차피 사람도 없고, 젊은 패기라 정자에 기대거나 누워 담배나 꼬나물고 줄담배를 피워대며 온갖 헛소리, 삽소리를 이어갔다. 물론 그 친구는 담배를 피지 않았다.

그 친구는 내가 제대 하던 해에 홀연히 중국으로 떠났다. 아버지가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데, 최근 갑자기 실적이 좋아져서 대학을 관두고 중국으로 건너가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 경영 수업을 받으러 떠난다는 것이었다. 급작스럽게 떠나는 바람에 얼굴도 보지 못하고 떠나갔다. 그야말로 바람처럼 떠나갔다.

제대하고 딱 한번 그 친구와 술을 마신 것이 그 친구와의 마지막이었다. 이후에도 몇 번 그 친구 번호로 연락을 시도했지만, 잘 연결이 되지 않았다. 아마 중국에 뿌리를 박을 생각이었나보다. 그 친구의 소식을 묻는 과의 다른 친구들의 연락도 뜸해졌다. 나도 제대하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면서 정신없이 바빠졌고, 로스쿨에 입학하면서 더더욱 바빠졌고, 일을 시작하면서는 더더더욱 바빠졌다. 그렇게 그 친구는 내 머릿속에서 가슴 속에서 잊혀져갔다.

요새 배민커넥트를 하면서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보니, 그 친구와 10년 전에 자주 가던 허름한 호프집이 아직도 장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워낙 동네에서 잘 놀지 않다 보니까 동선이 제한적이라 들릴 일 없이 잊고 있었는데, 그 호프집을 보니 문득 그 친구와의 추억이 떠올랐다.

그 친구는 잘 살고 있을까? 중국에서 사업은 잘 되고 있을까? 코로나 때문에 영향을 받진 않았을까? 숫기가 없는 녀석이고 여자에 별 관심도 없는 녀석이었는데, 연애 사업은 잘 할런지 등등 많은 궁금증이 있지만, 이제는 정말 닿을 길이 없다. 세상 영양가 없는 얘기들로 웃고 떠들던 그 친구와의 시간이 문득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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