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침 출근길에 서대문역에 내리면서, 스타벅스 앱을 통해 사이렌 오더로 커피를 주문한다. 개인 텀블러를 들고 다니기 때문에, 회사 앞 스타벅스 지점에 가서 개인컵을 전달해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개인컵으로 사이렌 오더를 하는 사람이 꽤 있어서, 파트너가 어떤 주문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닉네임을 물어본다.
내 스타벅스 닉네임은 "나는그지다"이다. 원래는 "나는거지다"로 하고 싶었는데, '거지'라는 단어는 닉네임으로 등록이 불가하단다. 그래서 살짝 변형해서 "나는그지다"로 닉네임을 정했다. 이 닉네임으로 커피를 주문한지도 어언 반년이 된 것 같다. 파트너가 닉네임을 물어보면, 나는 마스크 너머로 "나는 그지다"라고 외친다.
단순한 장난에서 시작된 이 닉네임이 이제는 익숙해졌다. 지금 내 재무 상황을 보면 부자는 아닌 게 확실하다. 가까운 시일 내로 부자가 될 가능성도 거의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내가 거지인가 생각해보면, 또 거지는 아니다. 빚이 좀 있긴 하지만 밥벌이는 하고 있고, 당장 거리에 나앉을 것도 아니니 말이다.
스스로 거지라고 되뇌임으로써, 모종의 위기의식을 만들어낸다. 대서양에서 청어를 잡아 런던항으로 돌아오면 청어가 다들 맛탱이가 가 있거나 죽어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부가 작은 상어 한 마리를 수조에 풀어 놓았더니 청어가 살기 위해 발발거리며 돌아다녔고, 그러다보니 싱싱한 상태로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를 수조에 가둬두고 상어를 풀 수는 없으니 (만약 그렇게 한다고 하면, 10초 안에 죽을 것이 자명하다), 의식의 차원에서 스스로 위기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래야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계획적으로 지출하며 미래를 위해 투자와 저축을 하는 자세가 함양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공부할 때도 그랬다. 누군가 내게 공부법에 대해 물어봤을 때, 나는 항상 강조해왔다. 목표를 100%로 설정하지 말고 120%로 설정하라고. 사람이 100%를 달성하기 위해 분주히 노력을 하더라도, 삶에는 다양한 암초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목표치의 80 ~ 90% 정도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이 정도도 대단히 노력한 결과이다. 그래서 아예 목표를 실제 도달해야 되는 정도의 120%로 설정해 두어야 내가 최대한 노력을 다 했을 때 100%에 근사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오늘 교과서를 100p를 정독하겠다면, 120p를 목표로 잡아두고 이를 위해 스스로를 독려해야 한다는 것.
오늘은 점심에 태닝샵을 다녀오면서 더위를 식히기 위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커피를 따로 주문할 계획이 아니었던지라 개인컵을 지참하지 않아, 일회용컵으로 주문을 넣었다. 매장 안에서 핸드폰을 보면서 음악을 들으며 주문을 기다리고 있는데, 음악소리 너머로 파트너가 나를 찾는 목소리가 넌지시 들려왔다. "나는그지다 고객님". 파트너가 나를 보며 웃으며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란데를 건넨다. 나도 웃으며 커피를 받아든다. 거지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의지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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