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에 책을 읽은 이후로 거의 8개월이 넘게 책을 손에 잡지 않았다. 일상이 바쁘다는 핑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뇌에 굳은 살이 배기는 듯한 불안감을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가을에 시간 여유가 있을 때 서점에 들려서 샀던 마이클 샌델의 책을 12월 들어서 본격적으로, 혹은 약간은 숙제를 하는 마음으로 숙독했다. 결국 해를 넘긴 오늘에서야 완독을 하기는 했지만, 오늘 읽은 분량이 30 페이지 정도이니 2023년에 마지막으로 완독한 책이라고 불러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정치철학의 입문서라면,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는 심화 강좌에 해당한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소크라테스식 산파술을 통해 정의와 공정, 그리고 정치철학의 다양한 핵심 의제를 흥미롭게 다루었다면, 이 책은 정치철학적 의제에 역사성을 더한다. 미국 헌정사 속에서 공화주의가 어떻게 수용되고, 대두되고, 힘을 잃어가는지, 그리고 공화주의적 시민관이 근대화, 산업화, 세계화 속에서 어떻게 소멸되어 갔는지를 다룬다. 어찌보면, 정치철학보다는 정치경제사에 가깝다는 인상마저 든다.
미국 헌정사를 잘 모르니 초반에는 책이 꽤 어려워서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중반 이후 속도가 붙으니 그럭저럭 읽을만 했다. 문장의 수준이나 내용의 깊이가 확실히 '정의란 무엇인가'보다는 깊어서 어렵긴 하지만, 충분히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책의 핵심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미국의 건국 당시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미국 그리고 미국의 의회 나아가 보통의 시민들까지 공화주의의 구현 내지 공화주의적 삶 또는 시민적 자세라는 덕목을 고민해 왔었다. 그러나 경제 부문의 비대화, 기업의 집중, 초세계적인 연결 등의 일련의 사태는 공화주의의 핵심, 시민이 자신의 공적 삶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역량, 즉 자치 역량을 약화시켰고, 자치의 개념 범위를 축소, 전용시켰고, 결국에는 시민의 삶에서 공적 요소를 거의 없다시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날 사람들이 느끼는 불만은 결국 공적인 영역에서 시민이 배제되어 있다는 불안감에 근거한다는 것.
이 책을 읽으면서 즐거웠던 점은 첫째로는 미국 헌정사라는 비교적 생소한 분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미국식 자유주의가 형성되어 온 통시적인 흐름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며, 셋째로는 나 스스로에게 던질 질문이 생겼다는 것이다. 물론 헌법 수정 때마다 연대기적으로 서술하고 있지는 않지만, 주요한 판결들이 어떻게 당시 미국의 정치 지형과 담론을 수용하였고 바꾸어갔는지를 엿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미국의 자유주의가 만들어져 온 역사성에 대해서도 고민을 역시 해 본적이 없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미국 내에서도 얼마나 다양한 목소리들이 존재하였는지 그리고 그러한 목소리들이 경합하면서 어떻게 현재의 정치적 담론이 형성되어 왔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점도 큰 소득이다.
가장 중요하게는, 나를 반추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샌델이 반복적으로 강조한 것처럼, 오늘날의 개인은 자신이 자신의 공적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의사결정에 전혀 참여할 수 없다는 사실에 무기력하다. 나 역시 사적인 삶 이외에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그것은 몇 년에 한 번 이루어지는 투표로는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도무지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샌델도 답을 하지 못한 문제다. 현대적 민주주의 체제에 공화주의적 가치를 환기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샌델이 지적하듯 세계화와 자본의 초국적 연결이 자연법칙이 아니라 몇 가지 선택들이 모인 우연한 결과라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지금 거의 모든 것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정지어져버린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우리의 미래는 선택들이 빚어낸 조합으로서의 한 가지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많이 배우고 깨우치고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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