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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 하얼빈

무소의뿔 2023. 1. 2. 19:40

김훈 소설을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김훈 만큼 소설을 잘 쓰는 한국 작가도 드물다. 아직 학생일 때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을 차례로 읽었으니, 십수년 만에 다시 김훈 작품을 집어든 셈이다. 사실 그 지난한 세월을 지나서 오랜만에 나온 김훈의 작품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 책을 펼쳤다.

김훈의 소설은 문장의 수려함보다 힘이 느껴진다. 말랑말랑한 감정을 노래하지 않지만, 담담한 어조에서 비롯되는 단단함이 있다. 한 문장 한 문장 꾹꾹 눌러 써져 한 마디 한 마디가 묵직하다. 그래서 김훈의 소설은 드라이하지만 강건하다.

흔한 연애소설이나 추리소설이 아니라 '문학'의 본체에 가깝다고 할 만한 현대소설은 마치 독립영화 같다. 감정의 인위적인 고조 없이도 한 편의 영화처럼 읽힌다. 김훈의 소설은 아날로그 필름으로 찍어낸 독립영화 같다.

하얼빈에서 김훈은 청년 안중근을 말한다. 젊은 안중근의 눈과 귀와 입을 빌려와 하얼빈에서 이토를 쏘기까지의 짤막한 시간을 재구성해나간다. 대의와 명분에 대한 지겨운 설파는 따로 없다. 오직 행위만이 있다. 조준선 위로 가늠하여 방아쇠를 당기는 그 행위만이 있다.

그러면서도 교차 편집을 통해 하얼빈이라는 특정한 지점으로 모여드는 제국과 식민지의 내적 긴장 관계를 잘 드러낸다. 이토의 시선에서, 순종의 시선에서, 빌렘의 시선에서, 메텔의 시선에서 이토 저격이라는 하나의 사건으로 귀결되는 역사적 관점 간의 모순과 긴장을 효과적으로 풀어낸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대목은 빌렘과 메텔의 서신 교환 부분이었다. 메텔은 빌렘에게 안중근 접견을 불허한다는 취지로 전보를 부치지만, 빌렘은 끝내 뤄순으로 간다. 그 장면은 약간의 숭고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빌렘이 태생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열강 선교사로서의 관점의 한계, 그 스스로도 안중근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끝끝내 뤄순으로 나아가는 그 발걸음은 빌렘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빌렘은 끝내 제국의 관점을 극복하지 못하였지만, 그럼에도 안중근을 품기 위해 나아갔다. 그런 모순을 견뎌내는 것은 어쩌면 제국주의 시대의 지식인의 숙명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김훈은 안중근의 행위를 절대적으로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냥 사건의 객관적 나열에 가깝다. 그냥, 힘들의 충돌, 세계의 충돌 속에서 한 청년의 행위를 담담히 노래한다. 이 책에 부제를 달 수 있다면, '칼의 노래'에 빗대어 '총의 노래'라고 이름 짓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