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필통과 다이제

무소의뿔 2022. 10. 4.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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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 때인가, 어느날 집에 간식으로 먹을 '다이제'가 있었다. 순간, 다이제를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데워 먹으면 더 맛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에, 포장지 윗 부분만 벗겨서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다. 레인지 안에서 파열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어렸을 때, 부엌과 요리는 온전히 엄마의 영역이었다. 이는 여느 가정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조리도구는 아이들이 다루기에는 다소 위험하니까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더욱 금기에 도전하는 스릴이 있었다. 엄마 허락 없이는 절대 만지면 안 된다는 것들을 하나씩 깨나가는 데서 오는 묘한 희열이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용돈을 모아 2,000원짜리 스누피 철제 필통을 문방구에서 하나 샀다. 나름 거금을 들여 산 필통이라 애지중지했었는데, 이 필통을 어떻게 하면 더 깨끗하고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을까 하다가 물로 씻고 비누로 헹구고 냉장고에 넣어두면 깨끗해지지 않을까 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청소와 빨래는 온전히 엄마의 영역이었다. 철과 산소가 만나면 녹이 슨다는 기초적인 과학적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한 나였다. 내 소중한 스누피 필통엔 금방 녹이 슬어버렸고 나는 울상이 되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십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삶의 많은 영역을 엄마와 그밖의 사람들에게 외주를 주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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