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가벼운 고성 여행

무소의뿔 2022. 8. 17. 17:15

속초터미널에서 북쪽으로 8km 정도 해안도로를 달리면 고성군이다. 고성의 남쪽에는 내가 좋아하는 천진해변이 있다. 거의 7~8년 전 친구의 추천으로 처음 알게 된 바다인데, 그때는 인적도 드물어 맑은 바다를 한적하게 즐기기 좋았다. 친구들과 2016년 새해 일출을 보겠다고 새벽을 달려 말간 해를 본 경험도 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울적할 때나, 바다가 보고 싶으면 가장 생각이 나는 바다였다. 6월에 동해안 자전거길 라이딩을 하면서 천진해변을 지나긴 했지만, 고행으로 지친 심신에게 그 바다는 온전한 목적이 될 수 없었다. 단지 30분 머물며 커피 한 모금 머금다 가는 경유지였다. 그렇다,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는 그 자체가 온전히 목적이 되어야 한다.

https://www.youtube.com/shorts/VKWy6m2SfnI

 

기록적인 폭우로 수도권이 신음하던 지난 주, 정말 기적처럼 금요일 딱 하루만 맑디 맑았다. 길일을 고르고 고른 것은 전혀 아니지만, 골라놓고 보니 길일이었다. 어제까지의 먹구름이 무색할 만큼 높고 맑은 하늘과 깊고 푸른 바다가 나를 반겨준다.

작년 같은 날에는 해수욕을 즐기는 인파로 이 바다가 가득 메워졌었는데, 태풍 때문인지 놀랄만치 한산하다. 작년에 그 인파 속에서 친구들과 해수욕을 즐겼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펜션에 주차를 하고 바로 준비한 와인을 챙겨서 해변으로 갔다. 코로나 때문에 결혼식 답례품으로 받아 쌓아둔 와인이 집에 한가득이다. 개중에 병이 가장 고급져보이는 녀석으로 두 병을 챙겨왔다. 한 병은 아예 까지도 않고 돌아갔다.

예전에 압구정에서 티와 리큐어를 혼합해 만든 음료를 마셨던 기억을 되살려서, 달콤커피 페퍼민트와 와인을 섞어 블렌딩해 보았다. 그냥 물 탄 와인 맛이다.

해변을 왔으니 열심히 준비한 몸을 뽐내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 즈음에 무리해서 상의를 탈의하고 짠 바닷바람을 맨몸으로 즐겨본다.

동해의 노을도 서해 못지 않다. 저 멀리서부터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이 알 수 없는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킨다.

근처 봉포항 회센터에서 7만원에 모둠회를 떴다. 잿방어와 도다리 그리고 돔이 차려졌다. 꽤 싱싱한 놈이었는지, 도다리는 몸이 다 해체되고 나서도 아가미를 펄떡였다. 원래는 은숙이네에서 주로 횟감을 떴는데, 오늘은 쌍둥이네에서 떴다. 바다에서 바로 떠서 먹는 활어회 맛의 8할은 바다 덕분이다.

거나하게 취하고 밤바다로 다시 기어나왔다. 구름이 제법 끼어있지만 옅어서, 월광을 채 가리지 못한다. 물결치는 호수에 비친 듯 싶기도 하다. 술에 취해 달도 나도 일렁인다. 많은 것들을 완전히 게워내기 위해 천진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자유로워졌다. 정말로 자유로워졌다.

https://www.youtube.com/shorts/z8yfvMF40FY

 

자고 일어나 홀가분한 마음 그리고 상당한 숙취와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은 흐렸다. 비가 다시 내리고 있었다. 기적처럼 짧게 맑았던 금요일 하루 동안 나는 많이 비워졌다. 이제는 많은 것들을 다시 채워나가야겠다. 채워나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