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장례식을 다녀와서

무소의뿔 2022. 8. 4.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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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퇴근길에 급작스럽게 부고를 전달 받았다. 로스쿨 때 꽤나 친하게 지냈던 동생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 방문이야 당연히 하는 건데, 일정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유산소 겸하여 저녁에 배달을 할려고 했는데, 내일은 또 친구들과 약속이 있고, 모레 아침에 발인이니까, 들릴 수 있는 시간은 사실상 오늘 밤이 유일하다. 일정을 이리저리 고민하던 차에, 저녁 11시부터 조문객을 받는다고 하여 배달을 뛰고 씻고 오트밀과 닭가슴살을 먹은 후 옷을 챙겨 입고 장례식장으로 가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다.

숨을 헉헉대며 언덕을 오르내리고, 땀에 절은 채로 골목길을 누빈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변호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하겠지? 장발의 진녹색 머리를 흩날리며 페달을 밟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변호사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배달을 뛰는 변호사가 나 말고 또 있을지 궁금하다. 그러고보니 머리를 탈색하고 진녹색으로 물을 들인 변호사가 나 말고 또 있을지 궁금하다. 그렇다면 머리를 진녹색으로 물들이고 배달을 뛰면서 변호사인 존재가 또 있을지 궁금하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적어도 우리나라에는 아마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샤워를 마치고 오랜만에 정장을 입었다. 지난 로스쿨 동기 형의 어머니 상 이후 처음 입은 듯하다. 저번에는 벌크업이랍시고 살이 많이 붙어서 정장바지가 맞지 않아서 콤비로 입고 조문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허리와 허벅지가 쏙 잘 맞는다. 눈대중으로 대충 보아도 허리가 최소 3인치는 줄은 듯하다. 괜시리 그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초록색과 금색 그 중간 정도의 내 머리색은 과히 검은색 수트와는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마치 일본 뒷골목 양아치나 동네 건달 같은 느낌이다. 요새 아웃도어 활동을 많이 해서인지 피부까지 적절하게 타서, 정말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선보인다. 맞지 않은 옷 또는 맞지 않는 헤어스타일, 둘 중에 하나는 걸치고 있는 게 확실하다.

지난 주 출고한 BMW를 타고 분당으로 향한다. 1시간 전까지 땀에 쩔어있던 육체노동자가 변호사 코스프레를 하는 것인지, 변호사가 노동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간다. 변호사라고 보기에도 부족하고, 육체노동자라고 부르기에도 이상하다. 그냥, 지금의 나는 나다. 다른 무엇인가로 환원하거나 규정하기 꽤나 곤란하다.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1년 만이다. 정확히는 350여일만이다. 1년 전과 달라진 게 하나 없는 식장의 구성, 건물의 배치를 보며 주마등처럼 1년 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생각해보면,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장례식장이 1년만에 크게 달라져야 할 이유도 없다. 기억이 따끔하게 나를 찌르기도 전에 상주가 된 동생의 얼굴을 마주한다.

동생은 로스쿨 때 같은 학회에서 활동했다. 국제중재와 관련된 활동을 주로 하는 학회였는데, 돌이켜보면 영어를 잘 하지도 못하는 내가 무슨 배짱으로 그런 학회를 기웃거렸는지 모르겠다. 패기 넘치는 시절이었다. ISD(Investor - State Dispute)니 International Arbitration이니 하는 용어들을 다루면서 모의중재 대회에도 참가하고 참 이래저래 재미가 있었던 시절이었다. 동생과는 그 학회를 통해 인연을 맺었다.

로스쿨을 졸업하고 동생은 바로 법무관으로 임관했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남학우들의 필수 코스이다. 변호사시험에 합격하면 군대 내 법무업무를 주로 다루는 중위로 임관한다. 일반 병사에 비해 근무강도나 처우가 훨씬 훌륭하지만, 그 대신 복무기간이 3년 반으로 상당히 길다는 단점이 있다. 내가 로펌에서 또 대기업에서 이리저리 3년 반을 구르는 동안, 동생은 나라를 위해 3년 반을 복무했다. 그리고 이번 주 드디어 전역하고 국내 유수 로펌에 입사하였다.

동생의 아버지는 동생이 입사하고 며칠 되지도 않아서 돌아가셨다. 사연을 들어보니 사고였다. 오랜 직업 전선에서 은퇴하시고 귀농하였는데, 농기계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하시고 급작스럽게 돌아가시게 된 것. 3년 반만에 동생의 얼굴을 보아 반가운 마음이 고개를 들지 못할 만큼 황망한 소식이었다. 내게 그 사연을 전해주는 동생의 목소리가 떨리고 울먹거렸다. 무언가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인생은 참 얄궃다. 동생네 가족에게 가장 즐거워야 할 때에 갑자기 날아들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라니. 정말 심성이 착한 친구고 배려심이 넘치는 친구다. 역량은 두말 할 것 없이 출중하고 성실하고 주변을 잘 챙기고 편안하게 해 주는 친구다. 그런 동생에게 닥쳐든 시련의 무게를, 내가 아무리 혜량하려 한다고 해도 충분히 혜량할 수 있을까.

너무 늦은 시간이라 오래 머물지 않고 금방 돌아왔지만, 돌아오는 길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삶은 참 허무하고 덧없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리 아등바등 사는 걸까? 행복은 무엇일까? 미래를 위해 지금의 행복은 어디까지 희생되어야 할까? 삶이 없으면 행복도 없을까? 다양한 생각들이 머릿 속을 스쳐간다. 하지만 그뿐이다. 새벽에 운전대를 잡은 자의 생각은 더 깊은 지점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질문의 외피만을 계속 맴돈다.

마음이 참 아프겠지만 동생이 잘 추스렸으면 좋겠다. 이제 변호사로서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한 동생이 변호사로서도 멋진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아직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이지만, 이 시련 또한 잘 이겨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의 부모님이 특별히 건강에 문제 없이 잘 살아계심에 안도하게 된다. 이런 슬픈 사연을 겪고 나서야만 그 중요성을 깨닫는다는 게 참으로 아둔하고 안일하지만, 부모님이 오랫동안 건강하게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 행복에 부모님이 나를 길러낸 노고의 10분의 1만이라도 내가 기여할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 부모님과의 영원한 동행은 불가능하겠지만, 아직은 동행의 끝을 고민하고 싶지는 않다. 살아계심에, 건강하심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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