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교복 와이셔츠의 깃

무소의뿔 2022. 7. 18. 17:40

주말에 배민커넥트 활동을 하느라 동네 여기저기를 자전거로 돌아다니다가, 스쿨룩스 가게를 지나쳤다. 문득 주마등처럼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제는 20년이나 된 기억이라 살면서 전혀 떠올릴 일이 없었고, 심지어 그런 기억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는데 말이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의 여름 하복은 반팔 와이셔츠였는데 하늘색 세로 줄무늬 패턴이 들어가 있었고, 와이셔츠의 깃은 하늘색이었다. 과히 괴랄한 디자인이었는데, 놀랍게도 학교 졸업생이신 고 앙드레 김 선생님께서 손수 고안한 디자인이라고 했다. 우리 학교의 하복은 인근 학교의 놀림거리였고, 심지어는 당사자들도 인정하는 바였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학교에서 교복 공동구매를 진행했다. 당시에는 엘리트, 아이비클럽 같은 교복 브랜드가 인기가 좋았는데, 학교 측에서 브랜드 교복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교복을 공동구매할 수 있는 장을 연 것이다. 나는 어린 마음에 내심 브랜드 교복을 입고 싶었지만, 결국 엄마의 뜻대로 교복을 공동구매했다.

여름이 되고 하복을 입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브랜드 교복은 와이셔츠의 깃을 뒤집었을 때도 하늘색 면이었고 공동구매한 교복은 와의셔츠의 깃을 뒤집으면 흰 면에 하늘색 줄무늬가 나왔다. 아이들은 다양성에 인색하다. 하복을 입는 시기가 되면서 어떤 아이들이 장난으로 다른 아이들의 깃을 뒤집고, 하늘색 줄무늬가 나오면 공동구매한 교복이라고 놀렸다. 내 깃도 한 번 뒤집어졌고, 나도 놀림을 잠깐 받았다. 아마도 당시 얼굴이 몹시 화끈거렸을 것이다. 마음 속의 큰 상처로 남지는 않았나보다. 딱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니 말이다. 

돌이켜보니, 여기에서 파생되는 에피소드들이 몇 개 더 생각 난다. 기억은 고구마줄기처럼 엮여있나 보다. 당시 또래 중에 집에 여유가 있는 친구들은 FUBU 브랜드(놀랍게도 지금은 망해 없어졌다) 의류를 겉옷으로 즐겨 입었는데, 그게 참 부러웠다. 나는 떡볶이코트를 입고 다녔다. 버버리 목도리를 두르고 다니는 녀석들도 있었다. 나도 버버리 목도리가 너무 갖고 싶었는데, 나중에 아빠가 유럽으로 연수를 다녀오는 길에 꼭 사다주길 바랬는데 가격 때문에 버버리 목도리 대신 스와치 시계를 선물해주셔서 속상했던 기억도 난다. 설날 용돈을 모아 옥션에서 5만원을 들여 버버리 셔츠를 산 적도 있다. 절대 진품이라고 광고를 해서 철썩 같이 믿고 샀고 만족스럽게 입고 동네를 돌아다녔는데, 어느 날 상가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짝퉁임을 깨달은 경험도 있다(당시 인터넷 쇼핑의 초창기였고, 통신판매업자들이 전혀 통제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애초에 5만원으로 버버리 셔츠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한 멍청함이 화근이었겠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헛웃음이 나오는 어린 시절의 치기 없는 모습이지만, 어렸을 때는 내심 속으로 많이 서러웠던 것 같다. 내 엄마와 아빠는 넉넉치 않은 시골에서 자라셨고, 집에서 대학 학비를 대 줄 형편이 안되어 혼자 힘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가진 것 하나 없이 결혼해서 서울로 상경했다. 나는 가끔 왜 우리 부모님은 재테크에 밝지 못할까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하지만, 그 분들이 살아온 생을 보면 지금 이 정도로도 이미 차고 넘치게 훌륭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다.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셈이다. 맨 주먹으로 시작해 두 아이를 훌륭한 사회인으로 잘 길러내었고, 초년 시절에 독하게 아끼고 절약한 덕분에 안락한 노후를 보낼 준비를 모두 마쳤다. 또 내 학비는 오죽 들었을까. 재수에 삼수에 대학 4년에 로스쿨 3년, 거기에 어려서부터 공부시킨다고 들인 학원비까지 이것저것 고려하면 참 자식 교육에는 아낌이 없으셨다.

그 대신 삶의 다른 영역에선 많은 아낌이 있으셨고, 어린 시절의 나는 그게 참 불만이었다. 가난하다고까지 볼 수는 없었지만 여유가 부족했고, 그런 것들이 어린 시절에는 어쩌면 실존적인 고민으로 다가올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두 자식을 다 길러내고, 엄마와 아빠는 주말마다 골프 라운딩을 즐겨 다닌다. 젊은 시절에 못 누리고 다니던 즐거움을 이제야 찾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죄송하기도 하다. 누군가의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자식에게 많은 것들을 내어주느라 자신의 삶을 충분히 즐기지 못하였다. 산란기의 연어는 몸의 80%가 알로 가득찬다고 한다. 사람도 연어도 다르지 않다.

나도 사회인이 되었고, 가끔씩은 두 분을 위해 기념일에 명품 선물도 챙겨 드리고, 좋은 레스토랑에 모시고 가서 정갈한 식사를 대접해드린다. 당연히 받은 것에 비하면 턱 없이 부족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나는 아직 삶의 많은 부분에서 채워나가야 할 것이 많다. 그래서 더욱 정진해야 한다. 일상에서의 소소한 즐거움을 잃지 않으면서도 미래를 계획해야 한다. 내 부모와 미래의 내 가족의 삶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항상 힘에 부친다. 나는 국제시장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항상 눈물을 참을 수 없다. 아직 누군가의 삶의 무게를 떠앉은 적이 없음에도, 나도 언젠가는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쓰러지지 말자.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다 이루려면, 더욱 치열해지는 것만이 답이다. 허나 즐거움에만 함몰되지도 말고, 치열함에만 매몰되지도 말자.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한 번 사는 사나이 인생, 대차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