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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해안자전거길(강원) 종주 후기

무소의뿔 2022. 6. 13.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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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까지 벌크업을 무사히 잘 마쳤다. 6월부터는 근력 운동에 유산소 운동을 더하여 벌크업 기간 동안 체내에 야금야금 쌓인 지방을 걷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나에게 주어진 하루에 24시간, 일주일에 168시간이라는 시간적 제약 속에서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체지방을 감량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찾은 정답은 자전거였다.

자전거로 주말을 이용해 국토종주 자전거길에도 도전하고, 주중 출퇴근을 자전거로 하면서 따로 유산소를 위한 운동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도 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리는 것!! 이것이 이번 내 여름의 목표이다. ENTJ 답게 벌써 여름 내내 즐거운 라이딩을 위한 계획이 가득 차 있다. 그 장황한 계획의 가장 첫 번째로 준비한 코스가 바로 동해안자전거길 강원 구간이다.

6월 초 연휴를 활용하여 3박4일 일정으로 라이딩 여정을 기획했다. 삼척 끝자락의 임원인증센터에서 시작해서 북쪽 끝자락인 고성 통일전망대인증센터까지 달리는, 즉 남에서 북으로 달리는 코스로 잡았다. 이렇게 짠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 하나 이유를 대자면 고성의 천진해변을 참 좋아하기 때문이다. 가장 맛있는 음식은 아껴놨다가 식사의 마지막에 먹어야 제 맛이듯, 라이딩 여행의 가장 크리미한 코스를 여정의 후반부로 남겨두고 싶었다.

버스를 탈 일이 많이 없던 나로서는 자전거를 버스에 싣는 것부터가 긴장되었다. 자전거를 버스에 실어본 적이 없으니, 혹시나 자전거 휴대가 거부 당하면 어쩌지, 이미 다른 자전거들을 잔뜩 실어서 내 자전거를 실을 공간이 없으면 어쩌나, 별에 별 생각을 다 했었는데, 무사히 잘 싣고 무사히 잘 도착했다. 

라이딩 1일차(임원 - 동해, 약 52km)

https://www.youtube.com/watch?v=WkWmQ7DLbaw 

살면서 처음 와 보는 동네다. 그리고 이렇게 생긴 터미널은 정말 처음이다. 명칭은 터미널이지만, 실질은 터미널이라고 보기 어려운 그런 상태였다. 하지만 여유롭게 동네 풍광을 둘러볼 처지가 못 되었다. 동해시에 숙소를 잡아뒀기 때문에, 오늘 안에 무조건 동해시까지 도착해야 되는 상황. 임원에서 동해시까지는 약 50km 길이었고, 내가 임원에 내렸을 때가 이미 6시가 넘은 상태였다. 내 자전거는 라이트도 없어서 최대한 해가 붙어 있을 때 멀리 가야했다. 참고로 라이트 없는 야간 라이딩은 정말 위험하다.

우선 동해안 자전거길 강원 구간 코스는 다음과 같다.

구간 연장
임원인증센터 - 한재공원인증센터 33km
한재공원인증센터 - 추암촛대바위인증센터 10km
추암촛대바위인증센터 - 망상해변인증센터 13km
망상해변인증센터 - 정동진인증센터 13km
정동진인증센터 - 경포해변인증센터 26km
경포해변인증센터 - 지경공원인증센터 18km
지경공원인증센터 - 동호해변인증센터 23km
동호해변인증센터 - 영금정인증센터 21km
영금정인증센터 - 봉포해변인증센터 7km
봉포해변인증센터 - 북천철교인증센터 26km
북천철교인증센터 - 통일전망대(민통선외)인증센터 17km

이때는 몰랐다. 임원에서 한재공원까지가 동해안 자전거길 강원 전 구간을 통틀어 가장 힘든 구간일 줄은... 첫날 총 등반고도만 600m가 넘어가는 어마어마한 업힐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애초에 임원터미널에서 임원인증센터로 가는 길 자체가 고행길이었다. 이제 막 산뜻하게 여정을 시작해서 웬만하면 페달을 밟으며 등정하려고 했는데, 경사가 도저히 허락치 않았다. 

라이딩 시작 20분만에 에너지가 빠르게 고갈되었다. 간신히 언덕 위에 자리한 인증센터에 올라 스탬프를 찍고 본격적으로 라이딩 여정을 시작해 본다. 짧은 다운힐 구간을 지나 업힐과 다운힐의 무한 반복을 거치며 조금씩 북으로 진격했다. 해안가를 따라 도로가 나 있지 않아 작은 산들을 넘는 산길을 경유할 수밖에 없는 구간이라, 정말 체력적으로 부담이 많이 되었다. 임원에서 한재공원까지 33km 여정은 평지 60km 이상에 버금간다.

그래도 간간히 언덕 끝에서 보이는 바다가 잠시나마 몸과 마음에 휴식을 준다. 흐린 날들이 예보되어서 큰 기대를 안 했지만, 맑든 흐리든 바다는 참 탁 트인 게 언제 봐도 기분이 좋다. 애초에 동해안 자전거길을 가장 먼저 선택한 이유도 역시 바다에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시간은 내 편이 아니다. 평지 33km 코스였다면 충분히 해가 떠 있을 때 한재공원인증센터에 도착할 수 있었겠지만, 업힐 33km는 정말 버거웠다. 가는 도중 결국 해가 저물었고, 라이트도 없이 야간 라이딩을 강행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동해시까지 가지 못하면 야외에서 노숙을 해야 할 판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서울에서 출발할 때는 32도로 몹시 더운 날씨였는데, 동해바다에 도착하니 기온이 20도 밑으로 떨어져 있었다. 몹시 힘들고 추운 저녁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21UfJk7VcY

그래도 어찌저찌 간신히 한재공원에 도착했다. 중년 부부가 인증센터 옆의 정자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나도 아주 잠시 바닷바람을 즐기고 스탬프를 찍고 다시 추암촛대바위를 향해 출발해 본다.

그래도 한재공원에서부터 추암촛대바위까지 가는 길은 그나마 나았다. 가로등도 간간히 있고 길도 평탄한 편이었다. 다운힐 구간에서 턱을 넘다가 핸들을 놓칠 뻔한 적을 제외하면 크게 위험 요소도 없었다. 여담으로, 다운힐 때 속도를 너무 즐기다가는 진짜 턱에서 크게 미끄러지거나 넘어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항상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왜 해안으로 길을 못 냈는지 알 것도 같다. 풍화가 더뎌 기암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조명을 달아 놓으니 바위와 푸른 밤바다가 참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여정의 고됨을 잠시나마 잊게 해준다.

추암촛대바위는 살면서 처음 본다. 생각해보니, 동해를 갈 때면 거의 강릉, 양양, 속초, 고성이었지, 그 아래쪽인 삼척은 살면서 1번인가밖에 와 본적이 없다. 이렇게 다시 보니 꽤나 장관이다.

추암촛대바위를 지난다는 것은 이미 동해시에 들어왔다는 뜻이다. 산업단지 부근에 한 모텔을 익스피디아로 이미 예약을 해 두었다. 연휴만 아니었더라면 예약하지 않고 그날그날 숙소를 정해도 괜찮았을텐데, 지방선거에 현충일까지 껴 있는 메가톤급 연휴라 이미 부킹이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그냥 떠났다가는 정말 몸 뉘일 곳 하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출발 전 부랴부랴 숙소를 예약했다. 숙소는 이후에 또 리뷰하겠지만, 첫날이 제일 멀쩡했고 뒤로 갈수록 상태가 나빴다. 역시 여행 전에는 계획을 철저히 세워야 한다.

아무튼 이렇게 힘든 여정을 마치고, 11시가 넘어서야 첫 날 라이딩이 끝이 났다.

 

라이딩 2일차(동해 - 양양, 약 85km)

https://www.youtube.com/watch?v=K9irKrxtWUY&list=PLib9RkHTGhevNamJGk0TcewvPhcmxCnjM&index=11 

숙소에서 편히 쉬고 2일차 라이딩을 시작한다. 동해안 자전거길 강원 구간 전체를 통틀어 2일차 라이딩 코스가 가장 쾌적하고 눈도 즐거웠다. 도로는 거의 해안을 접하고 있어서 바다를 원없이 볼 수 있었고, 그러다보니 언덕 구간도 많지 않아서 라이딩 자체를 즐기기에도 안성마춤이었다.

그 유명한 묵호항도 지나갔다. 1일차보다는 날이 살짝 개어서 훌륭한 바다뷰를 선사한다. 

망상해변까지는 금방 도착했다. 친구들과 항상 농담으로 "망상은 망상해변에서"를 외쳤는데, 정말 그 망상해변에 도착할 줄이야. 드넓은 백사장에는 아직 이른 오후라 그런지 가족 단위 여행객 몇을 제외하고는 꽤나 한산했다.

망상해변에서 조금 더 올라가자 드디어 동해시를 벗어나 강릉시에 도달했다. 두어 시간 라이딩을 하고 나니 카페인이 간절해서 잠시 해안가의 예쁜 카페에 들렸다. 여기서 고프로 배터리도 충전하고, 내 카페인도 충전하고 다시 출발.

정동진에 도착했다. 2년 전 추석에 정동진에 놀러왔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버려진 기차를 개조한 시간 박물관도 가족 단위 여행객이라면 한 번 들려볼만 하다. 가족끼리 자전거 여행을 온 집이 있었다. 인증센터 앞에서 아버지가 부인과 두 딸과 함께 셀카를 찍고 있어서, 내가 먼저 손 내밀어 가족 사진을 찍어주었다. 참으로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정동진에서 편의점 김밥과 닭가슴살 칩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다시 출발한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안목해변이 있다. 안목해변부터 송정해변까지는 카페가 즐비한 관광지이다. 2일차 숙소는 송정해변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간 곳에 위치한 송정해변의 게스트하우스로 잡아두었다. 게스트하우스치고는 숙박비가 5만원으로 상당히 비쌌지만, 여기를 제외하고 강릉 해안가에 남은 마땅한 숙소가 없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4시쯤 숙소에 체크인하고 짐을 풀었다. 1시간 정도 휴식을 하고 배낭 없이 가벼운 몸으로 다시 라이딩을 시작했다. 다음날 비 예보가 있어서, 비가 오기 전에 최대한 멀리 북쪽으로 이동하고 싶었다. 내 계획은 비가 안 오는 날 최대한 북쪽으로 진도를 많이 빼 두고, 우천 라이딩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숙소에서 경포해변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해가 떨어지기까지는 약 2시간이 남은 상황이었고, 잘 하면 지경공원 너머 동호해변까지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근처에 자전거를 매어두고 대중교통을 타고 숙소로 돌아올 요량이었다. 이것이 바로 망상이었다. 시골 버스는 참 일찍 끊긴다는 것을 간과했다. 양양시에 진입하기는 했지만 동호해변까지 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고, 편의점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을 때가 이미 7시가 다 되었다.

버스 정류장에 자전거를 고이 묶어 두고, 강릉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버스가 이미 끊겼음을 확인한 후 하릴 없이 카카오택시를 불렀다. 무려 49,800원이라는 엄청난 거금을 들여서 겨우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여행지에서는 이런 우연까지 여행의 일부가 된다고들 하지만, 5만원 돈을 택시비에 들인 것은 상당히 아까웠다. 하지만, 자전거를 다시 타고 돌아올 수도 없으니 지불할 수밖에.

돌아와서는 게스트하우스에 혼자 여행 오신 분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원래 이번 라이딩 동안 술을 마실 계획은 전혀 없었지만, 그 분이 딱새우회와 소주를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니, 오늘 하루 고생한 나를 위한 선물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나 간절해졌다. 그래서 양념치킨에 맥주를 시원하게 먹고 함께 밤바다에 나가 폭죽도 터뜨렸다. 라이딩으로 지친 몸을 쉬게 해 주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라이딩 3일차(양양 - 고성, 약 70km)

https://www.youtube.com/watch?v=KNjtjLGRcDM 

느지막히 일어나 주섬주섬 짐을 꾸리고 3일차 라이딩을 출발한다. 3일차에는 비 예보가 있어서 잔뜩 긴장했는데, 낮에 라이딩하는 동안에는 비가 오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어제 자전거를 묶어둔 곳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 이동하였다. 강릉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고, 시내에서 다시 양양으로 빠지는 버스를 탔다.

'북분리'라는 지명도 생소한 외진 곳에서 밤을 보낸 나의 자전거... 버스 종점에서 북분리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아무것도 없는 종점에서 1시간을 넘게 기다려야 한다. 잠시 고민하다가 택시를 불러서 북분리 정류장으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다행히 13,000원 정도 비용이 나왔다. 교통량이 없는 도로에서 택시가 쌩쌩 달리니, 정말 미터기 올라가는 속도가 물가 치솟는 속도 같았다. 그래도 어찌저찌 무사히 자전거를 탈환했다.

양양에서 속초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이번 라이딩 여행의 백미와도 같았다. 파도와 함께 호흡하며 달리는 기분은 정말 상쾌했다. 다리는 무척이나 고되지만, 시원한 바닷바람과 파도소리에 그간 쌓여온 여독은 순식간에 녹아 없어진다. 이 구간은 코스도 그리 험하지 않아 라이딩하기에는 정말 최적의 구간이라고 할 수 있다. 날씨만 조금 도와줬더라면 더욱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가득 담을 수 있었을텐데, 조금 아쉽긴 했지만, 이로써도 충분히 훌륭하다.

영금정에 오르지는 않았다. 이미 라이딩만으로도 너무 지쳐서 언덕을 또 오르면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일정을 다소 빡빡하게 기획해서 군데군데 바다나 명소를 여유 있게 즐기지 못하게 계획을 세운 점이 다소 아쉬웠다. 충분히 동해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여유를 좀 일정에 반영해 두었더라면 더욱 좋았겠지만, 아마 그랬다면 완주를 못 했겠지.

3일차 라이딩에서는 나름의 식도락이 있었다. 얼마 전부터 갑자기 군대 시절 즐겨 먹던 '간짬뽕'이 먹고 싶어졌는데, 도통 집 주변 편의점에서는 팔지를 않았다. 하릴 없이 입맛만 다시다가 잊어버렸는데, 이곳 속초 CU에서 간짬뽕을 발견했다!! 오랜만에 끓여 먹은 간짬뽕의 맛은 정말 최고였다. 놀라운 것은 이 날만 간짬뽕을 3개를 먹어치웠다는 사실이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이다. 심지어 라이딩으로 한창 배가 고플 때 먹으니 더욱 훌륭한 맛이었다. '은어'와 '도루묵'의 옛 이야기가 떠오를 정도였으니 말이다.

영금정인증센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봉포해변인증센터가 있다. 동해바다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고성 천진해변과 불과 1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봉포해변이다. 봉포에서 천진까지는 하도 자주 들려서 이젠 익숙할 지경이다. 천진해변에 '씨엘178'이라고 펜션이 있는데, 그 1층에 투썸플레이스가 있다. 어렸을 적에는 친구들과 여기로 와서 투썸에서 하루종일 바다만 보다가 돌아간 적도 있었다. 2016년인가에는 천진해변에서 함께 일출도 봤었다. 그만큼 즐거운 추억이 많은 곳이다. 상념에 젖을 때나 머릿속을 비우고 싶을 때 내가 제일 먼저 찾는 바다다.

커피 한잔과 함께 잠깐의 바다멍을 마치고, 다시 라이딩을 이어간다. 3일차 숙소가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어서, 우선 숙소에 짐을 풀기로 했다. 고성은 강릉이나 속초만큼 발달한 관광도시가 아니라 원래도 숙소가 부족한데, 연휴 기간이라 그나마 괜찮은 숙소는 이미 모두 마감이 된 상태. 고성 지역에서 3일차에 하나 남은 숙소인 '쭌 캠핑 펜션'을 예약했다. 여기가 이번 여행의 가장 최악의 장소와 경험이 될 줄은 이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내가 머물 곳은 이글루 같이 생긴 아주 작은 방이었다. 일반적인 룸 형식의 객실도 있었고, 카라반 타입의 객실도 있었고, 나처럼 돔 형식의 방도 있었다. 물론 내가 예약할 수 있는 곳은 오직 돔뿐이었다. 그것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짐을 풀고, 스트레칭을 하고, 아직 비가 오지 않을 때 조금이라도 멀리 가기 위해 다시 여정을 나섰다.

봉포해변까지 지나고 나니, 이제 남은 인증센터는 북천철교와 통일전망대 단 두 곳뿐이었다. 3일차 목표는 원래 봉포해변까지만이었지만, 조금 더 욕심을 부려 북천철교까지 가기로 결정했다. 북천철교로 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확실히 관광객이 많은 구간을 벗어나니 도로 포장 상태도 불량했고, 일단 지세가 너무 험해서 오르막이 은근히 많았다. 게다가 길과 길을 억지로 잇느라 굴다리를 지나거나 오솔길을 우회하는 등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확실히 북으로 다가갈수록 인적은 드물어졌다. 오며가며 마주치는 다른 라이더들의 숫자도 확연히 줄었다. 라이더들과 서로 마주칠 때 정답게 인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다른 이유로 하지만 같은 고행을 하는 어찌보면 현대판 순례자들이 아닐까 싶다. 그 순례자들이 나누는 찰나의 전우애랄까, 동지애랄까, 그런 묘한 감정이 있다.

두 시간이 걸려 북천철교인증센터에 도착했다. 북천과 남천이 있는데, 그 중 북천을 지나는 철교가 있었나보다. 지금은 더 이상 열차가 운행하지 않는 듯하다.

인적이 드문만큼 바다는 거셌다. 부드럽고 잔잔한 파도가 아닌 집어삼킬 듯이 거세고 날렵한 파도가 몰아쳤다. 하지만 그 또한 나름대로의 엄청난 장관이었다. 강한 기상과 꿋꿋함, 용맹함, 어떤 기개랄까 그런 숭고미가 느껴졌다.

어제의 경험을 바탕 삼아 3일차에는 조금 일찍 철수했다. 거진읍 정류장에 자전거를 고이 묶어두고, 3일차는 용케 버스를 타고 잘 귀환할 수 있었다. 오늘도 꽤나 장거리를 라이딩해서 오늘만큼은 제대로 된 저녁 식사를 하고 싶었다. 돌이켜보니 지금껏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한 적이 없었다. 매번 편의점에서 간편식으로 탄수화물을 채우고, 미리 챙겨간 닭가슴살 칩으로 단백질을 챙겼을 뿐이다. 게다가 오늘은 유독 날씨도 너무 추워서 따듯하고 정갈한 음식이 너무 간절했다.

숙소 근처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처음에 제육볶음을 파는 가게가 눈에 들어왔지만, 다른 메뉴는 없을까 하고 마을을 한 바퀴 도는 사이에 그새 가게 문을 닫았다. 문을 연 집 중에는 딱히 먹고 싶은 메뉴가 없어서 (물론 선택지의 폭이 넓지도 않았지만) 결국 편의점에서 햄버거와 과자, 맥주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서러운 3일차 저녁이었다.

하지만 진짜 서러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캠핑 펜션답게 화장실과 샤워실이 공용이었는데, 공용 샤워실의 구조가 요상했다. 공용 출입문 말고도 특정 호실에서 문을 열 수 있게, 출입문이 하나가 더 있었다. 그리고 그 문의 잠금장치는 객실 쪽에 달려 있었다. 즉, 내가 샤워를 하는 동안 그 객실의 누군가가 문을 열면 나는 여지 없이 알몸을 노출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가족 단위로 캠핑을 왔는지, 학생들이 샤워실 문을 자꾸 열길래, 이 공간은 사장님으로부터 공용 샤워실임을 확인 받았고, 지금부터는 내가 씻을테니 절대로 문을 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음에도 불구, 결국 그 댁 할머니가 샤워 도중 문을 열고야 말았다. 당황스럽고, 황당하고, 황망했다. 대충 샤워를 마무리하고 사장을 불러 이게 말이 되냐고 따졌다. 세상에 어느 숙소가 이따위로 설계를 해 놓느냐고 따져 물었다. 할머니한테도 사과를 요구했다. 처음에는 그 객실로 가서 여기에 할머니 있지 않냐고 따져 물었는데, 할머니가 없다고 우겼다. 그런데 공용 샤워실 문으로 들어가 객실로 가 보니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변명만 늘어놓을 뿐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사장의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벙쪄서 '네네'만 연발할 뿐, 진심어린 사과를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여지껏 살면서 경험한 최악의 숙소가 아닐 수 없다. 뒤늦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긴 했지만, 기분이 도통 풀리지 않았다.

돔으로 돌아와서는 빗소리 때문에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천장을 때리는 빗소리가 공명에 공명을 거듭해, 정말이지 너무 시끄러웠다. 공해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게다가 전등까지 반쯤 나가서 불이 들어왔다 꺼졌다를 반복했다. 너무 서러운 3일차 저녁이었다. 맥주라도 사오지 않았더라면, 참 끔찍하다. 고성에 가거든 절대로 '쭌 캠핑 펜션'은 가지 말자.

 

라이딩 4일차(고성, 약 25km)

서러움을 뒤로 한 채, 라이딩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였다. 밤새 내린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여전했다. 빗줄기는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라이딩하기에는 상당히 불편할 만큼 여전히 많이 왔다. 우선은 어제 자전거를 거치해 둔 거진읍 쪽으로 나가야했다. 짐을 꾸리고 버스를 탔다. 그 와중에 버스를 잘못 타서 고성군청 쪽으로 가게 되었다. 그 와중에 또 화장실도 급해져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결국 고성군청 민원실 화장실을 이용했다. 역시 시골에서는 관공서가 제일 깔끔하다.

우여곡절 끝에 거진읍에 도착했다. 버스를 내리자 다행히 비가 잠시 그쳤다. 원래는 간성터미널에서 동서울터미널로 가는 버스표를 예매해 뒀었는데, 거진에서도 버스가 출발한다는 사실을 알고, 기존 예매를 취소하고 새로 예매를 했다. 비가 와서 날씨가 몹시 추웠는데, 더울 줄로만 알고 겉옷을 전혀 챙기지 않아서 체온을 끌어올리기 위해 점심으로 짬뽕을 선택했다. 탁월했고, 맛도 좋았다. 해산물은 다소 부족했지만, 뜨거운 국물 덕분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라이딩 전 사전 조사가 부족했던 탓이다. 통일전망대 인증센터가 민통선 내외로 2곳이 있고, 민통선 내 통일전망대까지는 편도로 20km를 더 들어가야 했다. 그래서 이것까지 고려하여 라이딩 일정을 짰는데, 아뿔사, 민통선 내로는 자전거 출입이 불가하단다.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이고, 실제 자전거로 갈 수 있는 곳은 민통선 외 인증센터가 끝이었다.

가는 동안 빗방울이 거세졌다. 온몸이 비로 흠뻑 젖었지만, 페달을 밟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괴성을 내지르며 빗줄기를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은근히 즐기기도 했다. 대자연과 나와 자전거만이 남은 듯한 기분, 다른 감각은 소거되고 오직 나아가야 한다는 뚜렷한 의지만이 남은 상태. 싯다르타는 고행이 해탈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고 했지만, 범인(凡人)에겐 이만한 작업도 없다. 육체적 힘듦 속에서 정신은 또렷해진다.

다소 허망하게 동해안 자전거길 강원 구간 종주가 끝이 났다. 아쉬운 마음에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더 북으로 달려볼까 싶었다. 1km 정도 달렸을까, 더 달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거진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래도 그 1km 구간이 의미가 아예 없진 않았다. 10년 전 군 복무 당시 나는 방공 병과였고, 비호운용병이었다. 예하대대의 방공소대가 1년에 한 번씩 모두 이 마차진으로 모여 대공 실사격 훈련 및 평가를 했었는데, 나도 참여했었다. 그 젊은 시절을 함께 보냈던 전우들은 지금 뭐하고 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고 있었던 공간인데, 불쑥 떠올라서 참 많이 반가웠다.

작년 추석 제주환상 자전거길 이후 약 8개월만에 다시 라이딩을 시작해서, 걱정이 많았다. 다치지 않고 무사히 완주할 수 있을지, 내 체력이 이 라이딩을 버틸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해냈다. 정말 뿌듯했다. 자신감도 얻었다. 자전거 국토종주를 충분히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 말이다.

자전거 종주의 대장정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 하나둘씩 차근차근 자전거길을 밟아나가며, 더 성숙한 나로 나아가고 싶다. 많은 즐거움이 그 여정에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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