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맞이할 준비
아침 일찍으로 맞추어 놓은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어제 늦게 잔 거에 비해서는 잘 일어났다, 시간은 여섯시반. 인천공항에서 돌아와서 짐을 풀고 사진을 정리하고, 이것저것 서류들을 확인하다보니 열두시반이 되어서야 침대에 누웠다. 직장도 일상도 끊임없이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자꾸 생긴다. 적어도 내겐 일상도 체크리스트를 준비해서 처리해 나가야 할 업무들이다.
한동안 발걸음이 뜸했던 순대국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은 순대국은 조금 느끼했다. 순대국을 안 먹고 있던 사이 여름은 지나갔다. 작년 요맘때에는 지방으로 원정 라이딩을 다니고 강변터미널로 복귀해서 목동까지 자전거로 다시 30km를 달려왔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순대국 한 그릇으로 여정을 마치곤 했다. 입안이 헐 정도로 뜨거운 국물을 허겁지겁 삼키곤 했다. 그때는 몸도 마음도 허기졌다. 어제 먹은 순대국은 느끼했다.
어제 밤에 샤워를 했으니 간단하게 면도와 세수, 그리고 머리만 감고 출발했다. 오늘은 양재동에 있는 한 업체에 자동차를 파는 날이다. 원래대로라면 세부로 떠나기 전에 차를 팔고 떠났어야 했는데, 신분증을 안 챙겨서 매도용 인감증명서를 발급하지 못 했다. 알고 보니 신분증은 원래 회사에 있었다, 아니 내 가방 첫 번째 칸에 있었다. 몇 번 이해를 정정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사실은 개인인감을 등록했는지 여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인감증명서 발급이 안 될 경우를 대비해서 전날 밤에 법령을 미리 찾아봤다. 본인서명사실확인서라는 훌륭한 제도가 존재했다. 본인서명사실 확인 등에 관한 법률 제13조 제1항에 본인서명사실확인서가 인감증명서와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고 하고 있고, 자동차등록규칙 제33조 제2항에 본인서명사실확인서로 인감증명서를 대체할 수 있음이 또 명시가 되어 있어서, 만약 인감등록이 안 되어 있어서 인감증명서를 발급받지 못할 경우, 법령 근거를 바탕으로 본인서명사실확인서로 대체 제출을 받아줄 것을 업체에 부탁하는 시나리오까지 머릿속으로 그려놓고 잠에 들었다.
다행히 인감이 등록되어 있었다. 7시 즈음 양재동으로 출발했다. 올림픽대로는 그럭저럭 소통이 원활했는데,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하고나서부터 정체가 심했다. 삼성동까지 가는 것과 시간은 비슷했다. 주민센터 지하에 차를 대두고 근처 카페에 가서 메일함을 정리했다. 동생 두 명의 생일도 챙겼다. 카카오톡으로 선물을 보냈다. 좋고 편리한 세상이다. 어떤 인감이 등록되어 있을지 몰라서 몇 개를 챙겼는데, 그 중 다행히 등록된 인감이 있었다. 2부를 발급 받아 2km 정도 떨어진 중고차 매매단지로 향했다.
딜러는 친절했다. 헤이딜러를 통해 섭외한 딜러인데, 가격도 잘 쳐줬고 감가도 많이 매기지 않았다. 3년 전에 Z4를 팔았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역시 경험이 힘이다. 올림픽대로를 달리면서 아쉬운 마음에 마지막으로 컨버터블을 오픈하고 달렸다. 1년 1개월을 탔다. 9,000km가 조금 못 되게 탔다. 그 동안 나는 몇 번이나 뚜껑을 열었을까?
10시가 조금 못 되어 자동차 매매가 끝났다. 아침부터 서두른 보람이 있다. 차량이 내 손을 떠나고 나서는 아쉬움도 미련도 없었다. 의사는 결정하기까지가 가장 힘들지, 한번 정해진 의사를 실행해 나가는 것은 기계적이다. 아쉬움은 손쉽게 증발해버린다. 그래도 굳이 되짚어 보자면 추억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 열심히 돌아다녔다. 몇 번의 바다를 보고, 몇 번의 데이트를 하고, 몇 명인가를 태웠던 것 같다. 가장 잘 한 일은 지난 주에 엄마를 모시고 마지막 드라이브를 다녀온 일이다. 엄마는 10년만에 팔각정에 다시 오른다고 참 좋아했다. 서울의 야경이 참 예쁘다고 했다. 엄마는 내년이면 환갑이 된다. 엄마는 몇년간 주름이 많이 늘었고, 머리숱도 줄었다. 세월의 흔적이 엄마에게만 쌓이는 듯하다.
여행 때문에 미뤄덨던 중요한 재무적 의사결정들을 처리해나가고 있다. 당분간은 꽤나 정신이 없을 것 같다. 그래도 그 사이사이를 채워주는 좋은 사람이 있어서 한숨을 돌린다. 틈을 채우던 것이 어느덧 중심이 된다. 감사한 일이다. 뚜껑이 열리는 차가 없어도 가을이 기대되는 이유다. 여름은 가고, 가을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