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익어간다
5월 중순, 한 달 여의 남미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서울. 아직 밤 공기가 그래도 선선한 기운이 있었는데, 어느덧 두 달 반의 시간이 쏜살과 같이 흘러왔다. 새로 이직한 회사는 각오는 했지만,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일이 많았다. 한동안 안온한 삶에 익숙해져 있어서 다시 Work - oriented된 라이프스타일로 나아간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또 적응에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예전에 했던 가닥이 있으니, 그때의 기억을 되짚어가며 일을 해 나갔다.
일 자체는 재미 있다. M&A 변호사로 살기 싫어서 펌을 때려치고 나왔는데, 돌고 돌아 다시 M&A의 길을 가고 있다. 아마 그때의 나는 M&A 업무 자체에 불만족했다기보다는, 거대한 조직의 막내급 변호사로서 내게 주어지는 일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상태였나보다. 아니면, 1년 반 정도의 인하우스 생활이 나를 조금 더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을 수도 있고 말이다.
그래도 성격이 까칠한 선배 변호사와 일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아직 결정적으로 선을 넘지는 않았지만, 정서적인 어려움을 몇 번 겪을 뻔했다. 그건 하지만, 일부는 내 역량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니, 그냥저냥 받아들이거나 털어넘길 수 있다. 정서적으로도 조금은 더 단단한 사람이 된 것 같다. 이렇게 몇 년만 더 업무를 익히고 나면, 나도 어디 가서 당당하게 M&A 변호사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아무튼 새로운 직장, 새로운 업무에 집중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렀고, 여름의 한복판이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몹시 더운 날이다. 매일 꽉 막힌 올림픽대로를 헤쳐서 출근하는 것에 지쳐서, 회사 근처로 자취방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강남은 정말 비싸구나. 신축급의 오피스텔이나 빌라는 월세나 보증금을 감당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고 이 나이 먹고 원룸에 들어가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월세로 100만원은 지출할 각오를 해야 그래도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요새는 시간이 날 때마다 네이버 부동산으로 집을 알아보는 게 새로운 취미활동이 되었다.
작년 이맘때쯤 새로 뽑아서 잘 타고 다니는 BMW 420i Convertible은 친구에게 팔기로 하였다. 입사 기념으로 법인 차량을 하나 선물 받았는데, 출퇴근을 제외하고는 차를 타고 다닐 일이 많지 않고 아직 자동차를 두 대를 돌리기에는 내 역량이 안 되는 상황이라, 고민 끝에 친구에게 적절한 가격으로 양도하기로 결정했다. 예전 Z4도 그렇고 이번 420i도 그렇고, 신차를 인수하면 의도치 않게 1년만에 팔아버리는 일이 자꾸 생긴다. 이번 모델은 구하기도 어려웠어서 꽤나 애착이 있는 녀석인데, 그래도 친한 친구에게 넘기는 것이니 마음이 아주 불편하지는 않다.
강서구 아파트는 강남 자취와 맞물려서 임대차기간을 2년 갱신하기로 하였다. 처음 세입자와 계약할 때는 갱신의사가 없는 것처럼 말했었는데, 월초에 확인해보니 갱신의사가 있다고 하였다. 내가 직접 실거주를 할까도 고민했었는데, 출퇴근에 하루 2시간씩 쓰는 지금의 삶은 장기적으로 지속가능성이 없다고 판단, 자취를 결정하였고 그에 따라 임대차기간도 연장하기로 하였다. 다만, 전세보증금을 감액해 달라고 하여 또 돈을 마련해야 하는 어려움은 있다. 돈은 어떻게든 마련하면 되겠지.
요새는 시간이 나면 기타 연습을 하는 게 삶의 낙이다. 뉴진스에 심각하게 꽂혀버려서, 틈나는 대로 뉴진스의 곡들을 연습하고 있다. 최근에 새로 나온 앨범 수록곡들이 참 좋다. ASAP, ETA, Super shy. 아이돌이 이렇게 좋아져버려서야 큰 일이다. 심지어는 뉴진스 포토카드를 받고 싶어서 생전 마시지도 않는 코카콜라를 2박스나 주문해버렸다. 엄마가 자꾸 왜 마시지도 않는 콜라를 샀냐고 캐물어서 이실직고했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는다.
바쁜 와중에 바다도 몇 번 봤다. 바다는 언제 보아도 또 보고 싶다. 이번 주말, 다시 한 번 바다로 간다. 날이 맑으면 좋겠다. 420i를 타고 가는 마지막 바다 여행이 되겠지. 좋은 공기, 좋은 사람, 좋은 추억으로 가득 찬 주말이 되었으면 좋겠다.
자취를 시작하면 신디사이저를 하나 사야겠다. 여유 시간이 좀 생길테니, 취미 활동으로 작곡을 본격적으로 공부해 봐야겠다. 죽기 전에 내 이름으로 된 앨범을 하나 내는 것, 그게 내 꿈 중 하나이다. 미래를 대비해서 가을부터는 골프도 배워볼 예정이다.
생전 옷에 큰 돈을 안 쓰는데, 요새 컨템포래리 브랜드에 관심이 많아졌다. 6월에 준지에서 티셔츠를, 7월에 우영미에서 티셔츠를 한 장씩 샀다. 유니클로 티셔츠를 단위로 따지면 사지 않는 것이 백번 맞지만, 소비가 언제는 합리적이었을까. 한 달 또는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나를 위한 소비를 하면서 살려고 한다.
표류하는 삶에서 나아가는 삶으로 바뀌었다. 어디로 나아가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방향성을 획득했다는 사실이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명확히 알기까지는 안개가 조금은 더 걷혀야겠지. 그래도 큰 틀에서 나쁜 방향은 아니리라고 믿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