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그렇게 흘러간다

무소의뿔 2023. 3. 10.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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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없이 흘러간 한 주였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실망도 있었다. 영화 같은 일도 있었고, 뉴스 같은 일도 있었다. 시덥지 않은 일들로 가득 채워진 일상이었다. 어지러운 시간들이었다.

수요일에는 오랜만에 군대 후임을 만났다. 전역하고 2014년에 한 번 봤으니, 9년만이다. 내 부사수였다. 우리는 보직 때문에 군 생활의 대부분을 막사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에서 보냈다. 그 언덕에는 어린 시절의 내 기억이 가득하다. 10년 전으로 돌아가 24살의 내가 되었다. 술을 많이 마셨다. 취했다. 정신을 잃었다.

서대문역 인근에서 술을 마셨다. 후임을 먼저 보내고 지하철에 올랐다. 그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택시 타기가 아까웠나보다. 5호선에 몸을 싣고 완전히 뻗어버린 나는 눈을 떠보니 종점이었다. 지갑을 잃어버렸다. 종점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택시는 카카오페이 결제가 안 된대서 계좌이체를 해드렸다. 서대문에서 택시를 탔으면 나올 법한 요금이었다.

같은 날 사람도 잃어버렸다. 취한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그 사람을 저주했다. 미워해야만 내가 살 수 있었나보다. 증오와 분노를 가득 담아 한껏 저주를 퍼부었다. 다음 날 일어나서 후회했지만 너무 늦었다. 술이 채 깨지 않은 채로 억지로 담배를 펴서 정신을 차리고, 샤워를 하고, 엄마가 타 준 꿀물을 반쯤 마시고 출근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서 있기조차 힘들었는데, 어찌저찌 출근을 했다. 익숙하게 아메리카노를 한 잔 테이크아웃하고, 사무실에서 오전 회의를 준비한다.

화요일에 면접 본 회사에서는 따로 연락이 없었다. 2차 면접을 진행했다고 한다. 경력이 부족했을까, 연차가 너무 많아서였을까.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은 괴롭다. 침묵과 여백을 견딜 만큼 대범하지 못하다 나는. 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내게 주어지는 어려움들을 이해하기엔 나는 너무 참을성이 모자라다.

내가 저주를 퍼부었던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바에서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면서, 못다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여전히 나는 이해할 수가 없는 유형의 사람이지만, 멋있는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정확한 워딩을 빌리자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멋대가리가 없는데, 결정적인 몇몇 순간에 멋이 있는" 사람이다. 그 대범함을 높이 산다. 바에서의 시간은 영화 같은 시간이었다. 언어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많은 감정과 생각을 나눴다. 앞으로 그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어떤 인연은 어떤 지점에서 멈춰야 한다.

택시를 타고 한밤의 서울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와 잠을 청한다. 오늘은 강남에서 외부 미팅이 있어서 평소보다 출근을 서둘렀다. 그래도 외부 미팅이 있는 날은 법인카드 찬스가 있어서 택시를 타고 이동할 수 있다. 깔끔한 인상을 주기 위해 수트를 입고 갔다. 4년 전 선물 받은 넥타이를 챙기기도 했지만, 타이를 하지는 않고 미팅에 참여했다. 택시에서 눈을 붙인 채 베토벤의 음악을 듣다가 잠에 들었다.

점심에 친구를 만나 김치찌개에 짤라를 먹었다. 입맛이 없어서 먹는둥 마는둥 했다. 환담을 나누는 시간을 갖고, 다시 택시를 타고 광화문으로 돌아온다. 미팅 경과를 보고하고, 후속 작업들을 처리했다. 일에서는 별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 거대한 세상의 아주 작은 톱니바퀴를 돌리려 아둥바둥하는 과정에 어떠한 대의나 명분은 없다. 그보다는 연이틀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피로한 몸이 더 큰 세상으로 내게 다가왔다.

금요일 저녁이지만 퇴근하고 바로 집으로 왔다. 옷을 정리하고 불을 끄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엄마는 내게 무슨 속상한 일이 있냐고 물었다. 아무 일 없다고 답했지만, 사실 지금 내 삶은 속상한 일 투성이다. 하지만 그걸 구구절절이 설명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잠깐 선잠을 자다가 깨서 배달 어플로 떡볶이 세트를 주문해 반쯤 먹다가 다이어리를 쓴다.

잠을 푹 자고 나면 나아질 것이다. 시간이 약이다. 정말 죽을 것 같이 힘들었던 시간도 이겨보냈으니, 지금 그리고 다가올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잠들기 전에, 이 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친구와 잠시 통화를 해야겠다. 오늘도, 이번 주도 너무 수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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