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안대교 앞에서
오늘은 회사의 마지막 재택근무일이다. 3월부터는 재택근무가 완전히 폐지되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내리 출근을 해야 한다. 비정상의 정상화일까, 뭐 본질을 무엇이라고 평가하든, 사실상 주4일 근무가 주5일 근무로 돌아오는 셈이다. 내게는 그것이 본질이다. 마지막 재택근무인 금요일을 기념하기 위해, 부산으로 짧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KTX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5만 9천 800원이다. 6만원으로 하지 왜 굳이 200원을 뺐을까. 예전 학부 때 마케팅 수업에서 저렇게 몇 백원을 빼는 게 소비자의 구매 의사결정에 나름 꽤나 영향을 미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차피 기차는 타야 할 사람은 탈 텐데 왜 굳이 200원을 기어코 뺐을지 모르겠다.
어제는 오후에 반차를 냈다. 서초동 법원 앞에 있는 작은 규모의 사무실에서 면접 제의가 왔다. 이력서를 넣고 며칠 만의 일이었다. 전날 술을 마셔서 아침에 조금 늦게 일어났다. 정장을 갖춰 입고 회사로 가기에는 준비가 다소 귀찮아서 그냥 평소대로 입고 출근했다. 대신 오후 반차니까 집에 돌아와 점심을 대충 때우고 누워서 쉬다가 양복을 걸치고 면접을 보러 출발했다.
면접 보기에 앞서 법원에 있는 친한 형을 불러서 잠깐 담배 타임을 가졌다. 형은 면접 어땠냐고 물어봤는데, 아직 면접 보기 전이라고 말하니까, 역시 특이한 놈이라고 웃어넘겼다. 생각해보니, 만나서 면접 썰을 들려주는게 더 자연스러운 모습인 것 같긴 해서 나도 웃음이 났다. 형은 올해부터 담배를 끊었는데, 잘 참고 있는 듯했다. 나만 내리 두 대를 피우며, 형이 사준 법원 카페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형은 내게 면접 보기 전에 겸손을 최소 한 다섯 번쯤 외치고 들어가라고 당부했다. 겸손이 늘 부족하다고 했다. 농담 반 진담 반이라 나도 반쯤만 마음에 새겨 들었다.
중간 관리자가 면접관으로 올 줄 알았는데, 대표가 직접 면접을 보았다. 판사 출신이고 한때 꽤 잘 나갔던 유력 정치인이었던 분이었다. 실물을 보니 신기했다. 간단하고 형식적인 질문과 답변이 오갔다. 사실 특별히 면접을 준비하지도 않았지만, 특별히 집요하게 뭘 묻지도 않았다. 그냥 내 이력을 보고 뽑을 요량으로 날 불렀었던 듯하다. 커피도 직접 그라인딩해서 내려 주어서, 한 잔을 더 마셨다. 그렇게 채용이 결정되었고, 출근일도 잡았다.
마침 면접 끝나는 시간과 퇴근 시간이 비슷했던 친구를 불러 영등포구청에서 잠깐 티타임을 가졌다. 근황 이야기, 면접 이야기, 뭐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오랜만에 딸기라떼를 마셨다. 예전에 학교 다닐 때 ‘느티나무’라는 학네 카페가 있었는데, 거기서 ‘리얼딸기라떼’를 참 즐겨 마셨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나는 그 음료를 꼭 ‘리얼개돼지라떼’라고 불렀었다. 당 함량이 높아, 덮어놓고 마시다보면 개돼지가 된다는 취지였다.
막상 채용 결정이 났는데 딱히 엄청 기쁘지가 않아서, 왜 그럴까 친구에게 물었더니, 친구가 말하길 “쉽게 얻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득 그 말이 참 맞다고 생각됐다. 쉽게 얻은 것에 우리는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대상의 본질적 가치나 내재적 가치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는 건, 그것을 얻기까지 내가 들인 ‘노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찌되었건, 원하던 것을 얻었다.
다음 주에 출근하면 팀장님께 바로 퇴사 통보를 해야 한다. 팀장님은 좋은 분이다. 나의 퇴사가 팀장님의 마음에 아픔으로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은 부산이다. 광안리 해변을 조금 걷다가 광안대교가 보이는 카페에 들어와서 다이어리를 끄적여 본다. 곧 친구가 올 때까지 한 두 시간 정도가 남았는데, 카페에서 조금만 더 쉬다가 밤바다를 걸어야겠다. 푹 쉬고, 즐겁게 서울로 올라가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