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주말 동안의 기록

무소의뿔 2023. 2. 13. 13:39

이래저래 주말이 흘러갔다. 더딘 듯 빠르게 꾸역꾸역 잘도 흘러간다. 시간이 더디게 흐른다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 없다는 뜻이고,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는 것은 허송해버린 날들에 대한 후회 같은 것이며, 시간이 꾸역꾸역 흘러간다는 것은 생의 유한한 모래시계가 그만큼의 모래알을 아래로 흘려보냈다는 것이다.

금요일에는 원서를 접수했던 펌에서 쏘리 메일을 받았다. 면접은 당연히 불러줄 줄 알았는데 의외의 결과에 내심 놀라우면서도 실망스러웠다. 공고의 모집대상 연차를 살짝 넘기긴 했지만 스펙상으로 내가 많이 불리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버스펙이었을까 아니면 원하는 경력이 부족해서였을까. 1월 이직 준비를 시작하면서 패기로웠던 마음이 꽤 많이 꺾여져 나갔다. 상황을 조금 더 냉엄하게 인식하고 대응할 필요가 있어졌다.

친구를 만나 술국에 머릿고기를 먹으며 쓰린 속을 달랬다. 대충 요기를 마친 후에 함께 PC방으로 가서 게임을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꽤 의욕적으로 게임을 할 열정이 있었는데, 이제는 몇 판 하고 나니 흥미가 싹 가신다. 예전에 했던 이 게임, 저 게임을 기웃거리다가 10시도 안 되어 집으로 돌아간다. 침대에 누워 하릴 없이 쇼츠 영상을 보다가 잠에 들었다.

토요일에는 다른 친구들을 보러 용인으로 갔다. 고기리막국수라고 맛있는 들기름막국수 가게가 있다고 했다. 경부고속도로에서 금토 분기점으로 나와 차를 계속 몰고 갔더니, 대장 IC라는 곳에서 고기리로 빠지는 출구가 보인다. 여기가 그 유명한 대장동이구나, 아직 허허벌판이구나, 이런 생각들을 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누나는 다음달이 해산달이라고 한다. 둘째라 그런가 첫째 때보다 더 능숙하고 의연한 모습이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이런저런 근황 이야기를 나눈다. 사실 유부녀들의 근황이란 뭐 새로운 게 없다. 그저 내가 그 몇 달간 겪었던 일들, 장황히 혹은 간략히 썰을 풀다가 일어선다. 해가 질 무렵 집으로 돌아와보니 엄마와 아빠는 스크린 골프를 치러 나갔다. 저녁 생각이 딱히 없었는데 속이 허해서 그런지 오랜만에 쿠팡이츠로 곱창볶음을 배달시켰다. 배달 시간에 맞춰 맥주를 사러 편의점에도 들렀다. 맥주와 곱창을 먹으며 넷플릭스로 '연애 빠진 로맨스'를 본다.

일요일에는 가족과 저녁을 먹으러 집 앞 낙지 가게를 다녀온 것 외에는 집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오후에 조깅이라도 좀 할까 싶었는데, 조깅을 할 마음을 먹는 동안 엄마와 아빠가 등산을 마치고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소화가 좀 되면 조깅을 갈까 싶었지만, 해가 저무니 몸과 마음이 모두 귀찮다. 어제 먹다 남은 맥주를 다시 따서 먹는다. 매킨토시에서 LOL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하루종일 영상을 보다가 또 LOL을 하다가, 침대에 눕다가 그러다가 잠이 들었다.

요즘에는 월화수목이 금토일보다 나은 듯하다. 기다리는 것이 없으니, 주말은 더 지루하고 무료하다. 그렇다고 월화수목이 딱히 의미 있는 시간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금토일은 정말 텅 비어버린 시간이라 견딜 수가 없다. 내가 의미를 부여했던 것들은 다 먼지처럼 흩어졌다. 그 폐허 위에 다시 새로운 의미와 질서를 세우는 일은 쉽지 않다.

아닌가, 이런 상념조차 지금 이직을 앞두고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서 나 스스로 만들어낸 지옥적 환상 같은 것일지도? 무엇이 되었든, 2월이 빨리 지나가야 안개가 조금 걷힐까 싶다. 그때까지 통용할 수 있는 임시의 삶의 질서를 구축해 보는 것을 오늘 일과로 삼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