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나를 추앙하기로 결심했다.

무소의뿔 2023. 2. 6. 14:34

많은 사람들이 나를 두고, 자존감이 높은 것 같다고 평했다. 나는 진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일까? 자존감. 사전을 황급히 찾아보니,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에 대한 긍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나를 잘못 본 것 같다. 아니면, 적어도 그때의 나는 자존감이 높았지만, 지금의 나는 자존감이 낮은 것 같다. 나는 지금 내 모습을 긍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습관처럼 내뱉는 부정적인 말들이 나의 자존을 갉아먹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 힘으로 해결하기에 꽤나 벅찬 상황들이 연속적으로 밀려들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공허한 생애를 관통할 만한 명징한 인생의 목적의식이 부재하기 때문일까? 우울감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가 물거품처럼 사그라들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부재감은 다른 문제이다. 그리고 더 정확히는 무엇이 문제인지조차도 파악되지 않기 때문에,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쉽사리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나를 추앙하기로 결심했다. 추앙. '높이 받들어 우러러본다'는 뜻이다. 작년에 나의 해방일지를 꽤 열심히 봤었다. 염미정은 구씨를 추앙하고, 구씨에게 자신을 추앙할 것을 주문했다. 누군가를 추앙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로 표상될 수 있을까? 염미정은 염미정의 방식으로, 구씨는 구씨의 방식으로 서로를 추앙했다. 방법은 서로 달랐으나, 그 둘은 적어도 추앙 비스무리한 어딘가에는 닿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방식으로 나를 추앙하여야겠다. 방식이나 방법은 더 고민해봐야겠지만, 추앙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자존감을 높이기 위하여 나 스스로를 추앙하여야 한다는 말은 어폐가 있어 보인다. 높이 받을어 우러러보는 행위와 마음가짐이 있다고 하여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긍정할 수 있을까? 공고한 자존감이 자기 추앙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닐까? 즉, 원인과 결과를 내가 혼동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지만, 별 도리가 없다. 우선은 지푸라기라고 잡는 심정으로, 자기 추앙을 먼저 실천해보자. 그리고, 충분해지면, 누군가를 추앙하는 일로 나아가봐야겠다. 그것이 이 무의미한 세상에서 삶에 질서를 부여하고, 생에 의미를 충전하고, 살아나감의 의미를 구성하는 방식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영원히 대답하지 않는 신을 추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살아있는' 사람을 추앙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훨씬 간단한 일일 수 있다.

자기 추앙을 위한 구체적 방법론으로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는 감사하는 일을 적어보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도 버거우니, 하루에 3개씩만 감사한 일들을 곱씹어봐야겠다. 이런 날들이 쌓여 조금 더 단단한 내가 되길 바라본다.

1. 미국에서 아버지가 선물로 사온 스니커즈를 신고 출근했다. 검은 색의 단정한 스니커즈인데, 신발끈이 따로 없어서 신고 벗기가 참 편하다. 걷기에도 부담이 없다. 바쁜 미국 출장 일정 속에서도 아들을 위해 선물을 골라온 아빠가 있어 감사하다.

2. 회사에서 먹을 닭가슴살과 가래떡을 매일 아침 엄마가 데워서 도시락 가방에 챙겨준다. 오늘은 해동을 깜빡하셨는지, 닭가슴살이 얼어있었다. 순간 엄마에게 카톡을 넣어 해동을 잊었다는 핀잔을 할까 싶었지만, 그렇게 매일을 나를 위해 준비해주는 엄마의 정성이 참 고마워서, 따로 카톡을 넣지 않았다.

3. 저녁에 회식이 있어서 나름 단정하게 입는다고 오랜만에 코트를 입고 출근했다. 점심에 헬스장을 다녀오는데, 코트를 입고 벗기가 거추장스러워서 (헬스장의 보관함은 코트를 온전히 담기에는 꽤 작은 편이다) 아우터 없이 다녀왔다. 날이 많이 풀려서 조금 쌀쌀하긴 해도 회사와 헬스장 사이를 오가기에 크게 무리는 없었다. 날이 꽤 따듯해서 고마운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