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의 일기
어제 분명 1시 전에 잠 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9시다. 잠깐 화장실을 다녀와 다시 잠을 청한다. 그렇게 자고 깨기를 몇 번 반복하고 2시다. 이젠 진짜 잠에서 깨어나야지. 첫 번째 의사결정은 오늘 헬스를 할지 말지이다. 순서상으로는 가슴과 팔 루틴을 하는 날인데, 어쩐지 몸이 찌뿌둥하다. 지난 화요일에 가슴 운동을 했었는데 그때 쌓인 근피로가 아직 안 풀렸는지, 여전히 가슴 부근이 뻑뻑하다. 오늘의 첫 번째 의사결정은 헬스장을 가지 않는 것이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다. 오늘 두 번째 의사결정은 샤워를 마치고 바디로션을 바를지 말지이다. 피부가 많이 건조한 편이라 샤워를 마치고 나면 바디로션을 발라주는 게 좋다. 하지만 온몸 구석구석 로션을 바르는 작업은 시간도 꽤 들고 무엇보다 귀찮다. 오늘은 바디로션을 바르지 말아야지. 하루쯤 안 바른다고 해서 피부가 갈라질 것도 아니니 크게 개의치 말자. 오늘의 두 번째 의사결정은 바디로션을 바르지 않는 것이다.
집을 나선다. 3시가 되기 직전이다. 어제 송년 모임을 한다고 저녁을 많이 먹었더니 반나절이 지났는데도 별로 허기가 지지는 않는다. 스타벅스에 가서 간단한 샌드위치와 커피로 늦은 점심을 때울지, 내가 자주 가는 순대국집에 가서 순대국을 먹을지 고민을 한다. 순대국을 먹지 않을 것이라면 7시 예약해둔 영화관 근처의 스타벅스로 바로 가면 된다. 거기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고 다이어리를 끄적이다가 하얼빈을 마저 읽고, 근처 교보문고로 넘어가 틈틈이 읽기 시작한 김영민 교수의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읽고 영화를 보러 가면 된다. 순대국을 먹을거면 동선이 정반대이다. 아니다. 순대국을 안 먹더라도 영화관 근처 스타벅스보다는 역 근처 스타벅스가 더 자주 방문해 온 탓에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역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다 보니 순대국을 그냥 먹을까 싶다. 오늘의 세 번째 의사결정은 점심 메뉴였다.
날이 춥다. 추워서 그런건지 사람이 자꾸 움츠려들게 된다. 어쩌면 한 해 동안 내게 주어진 에너지를 모조리 소진해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10월 헬스 대회를 준비하면서 내 안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기력을 다 쥐어짜내서, 그래서 해가 넘어가려는 이 시기에 고장난 나침반의 바늘처럼 갈피를 못 잡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의지의 수준이 낮아지는 게 어쩌면 노화의 과정일까? 젊은 날의 열정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이제는 내게 남아있지 않는 것일까? 해가 바뀌면 새로 준비해야 할 것들이 참 많은데, 이런 무기력감 속에서 내가 다시 한 송이 꽃을 피워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어쩌면 이 넓은 세상에서 혼자 표류하고 있다는 것, 그게 내 우울감과 무기력감의 근원일지도 모르겠다. 왁짜지껄한 잔치가 끝난지는 오래, 친구들은 각자의 가정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카카오톡을 열어봤자 연락이 오는 곳도 없고, 그나마 오는 연락도 다 휘발성이고 의미가 없다. 집이 없다 내게는, 돌아갈 집이.
순대국을 먹으며 좀비트립 시즌2를 본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엄마와 아빠가 순대국집에 들어온다. 9월인가 배달 알바를 하느라 동네를 자전거 타고 지나가다 마주친 이래로 제일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골프 스크린 게임을 마치고 늦은 요기를 하러 동네 식당을 돌아다니다가 내가 말한 순대국집이 생각나서 들렸다고 한다. 내 옆자리에 앉아 엄마는 순두부찌개를 아빠는 순대국을 주문한다. 나는 식사를 후딱 마치고 자리를 뜬다. 죄를 지은 것도 없는데 괜시리 민망함이 밀려든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사람들을 관찰하며 다이어리를 끄적인다. 케잌을 든 연인들, 담소를 나누는 친구들, 혼자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보는 사람들, 심지어 주말인데 일하는 사람들까지. 밖으로 나오길 잘했다.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해서 반드시 특별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어차피 더 이상 볼 유튜브 쇼츠 영상도 없었으니 말이다. 저녁에 볼 아바타2를 기다리며, 이제 하얼빈을 펴서 조금 읽어볼까 싶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