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Gig Working

LEET 모의고사 지문 출제 - 1,004,360원 (22. 05. ~ 22. 07.)

무소의뿔 2022. 8. 16.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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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소개로 로스쿨 입시준비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원에서 쓸 모의고사 문제를 출제하는 알바를 잠시 했다. LEET는 'Legal Education Eligibility Test'의 줄임말로 우리말로는 법학적성시험이라고 한다. 즉, 로스쿨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하기에 적합한 독해력, 사고력을 갖추었는지를 평가하는 시험이다.

당연히 나도 로스쿨 입학을 준비할 때, 기출문제를 포함하여 다양한 사설 모의고사를 풀어보았었고, 천운으로 좋은 점수를 받아서 원하는 로스쿨에 입학할 수 있었다. 체감 난이도는 수능 국어의 제곱 정도 되는데, 내가 즐겨 하는 표현으로는 '수능 국어에서 1등급을 맞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다시 1등급부터 9등급까지 가리는 시험'이 있다.

내가 이 Gig working을 하기로 결정했던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남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서 나쁘지 않은 부수입을 거둘 수 있다는 점, 둘째, 지문을 다듬고 선지를 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오랜만에 잠자고 있는 뇌에게 신선한 자극을 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셋째, 내가 만든 문제를 학생들이 진짜 푼다고 생각할 때 오는 일종의 희열(?)이었다.

3달에 걸쳐 총 6개 지문을 출제하였고, 그 보수로 세금을 제외한 1,044,360원을 수령하였다. 1지문에 174,060원을 받은 셈. 1지문을 출제하는 데 소요한 시간은 평균적으로 6시간이 안 되었으니, 시간당 29,010원으로 셈칠 수 있다. 시급으로만 놓고 보면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6개 지문 출제 이후 이 작업을 그만두기로 결정하였다. 그 이유 또한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출제가 누적될수록 훌륭한 지문 소스를 찾기가 더 어려워졌다. 대학생 또는 대학 졸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이니 만큼 난이도가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논문을 바탕으로 지문을 구성하는 게 출제 효율성 면에서 다소 편리하다. 그렇지만, 국내에 출판되어 있는 법학 논문 중에 '지문화'하기 좋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논문이 그리 많지 않았다. 내용 자체의 충실함과 엉성함이라는 차원에서도 만족스러운 논문의 절대적인 수가 부족했지만, 여러 개념들이 복합적으로 제시되고 그개념들 간의 다양한 논리적 층위를 다각적으로 조망하는 논문은 더더욱 부족했다. 요컨대, 지문화하기 좋은 논문의 수가 많지 않아서 출제가 거듭될수록 창작의 고통이 더해질 것임이 명약관화하였다.

둘째, 절대적인 시간당 보수는 나쁘지 않았지만, 체감하는 시간당 보수가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내가 들이는 노고에 비해 나에게 돌아오는 몫이 적고, 학원이 가져가는 이득이 더 크다고 느껴졌다. 예전 행동경제학 실험에서 100원을 두 사람이 나누어가지는데, 한 사람에게는 분배 비율의 권한을, 다른 한 사람에게는 수용 또는 거부 권한을 부여했더니, 5:5 부근에서 평균값이 나왔다는 실험 결과가 있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상대방이 90원을 가져가고 나한테는 10원만 떨어지더라도 이를 수용하는게 맞는데, 기분이 상해서 그냥 공멸의 길을 택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절대적인 시간당 보수는 나쁘지 않다고 하더라도, 일을 하면 할수록 자본가(?)를 위해 내 재능을 착취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셋째, 커팅이 심화될수록 전반적인 기력이 떨어져서 왕성한 뇌 활동을 벌이기 어려운 컨디션이 되었다. 이건 진심이다.

아무튼 이런저런 비교형량 끝에 출제를 그만두었다. 100만원 정도 벌었으니 그렇게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그리고 진짜 누군가는 내가 만든 모의고사 지문을 풀겠지. 그 또한 정말 짜릿하다. 그 친구들이 모두 원하는 로스쿨에 합격하길 빌어줄 법적, 도덕적 의무는 없지만 (그리고 그렇게 빌어주고 싶지도 않다, 이유 없는 호의는 베풀지 않는다) 최소한 자신의 역량에 비해 손해 보는 일은 없길 바란다. 아울러 내 지문이 그들의 실력 함양에 아주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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